<우리가 지나친 순간들> 냉전의 바다에 빠진 외딴섬 제주 (한성대신문, 576호)

    • 입력 2022-04-04 00:03
    • |
    • 수정 2022-04-04 00:16

<편집자주>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친, 혹은 무관심 속 잊혀지고 있는 역사는 없을까. 백암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잃었을지언정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며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라 말했다. 우리가 지나친 역사적 사건을 찾아 잊힌 우리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 광복 후 국가 건설을 위한 이념 다툼으로 시끄러웠던 한반도. 유독 제주도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극한의 대립 속에서 쓰러져갔다. 제주도민들이 이념의 계곡 속에서 익사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념과 피로 가득했던,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뒀던 제주의 한을 따라가 보자.

김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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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별도봉에서 발굴된 제주4·3사건 희생자들의 유해 [사진 출처 :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

"이념 갈등 속

무고한 사람이

희생을 당했다"

대립의 한가운데 놓인 제주

제주4·3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막을 연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에 이르기까지 당시 제주도민 중 10%에 이르는 자가 사망했다고 짐작될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야기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평화의 섬’으로 알려진 제주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1947년, 삼일절을 맞은 제주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되짚어 봐야 한다.

사건은 좌익 세력을 중심으로 진행된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했다. 도민들이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끝나고 이동하던 중,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6살 아이가 다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나버렸다. 격분한 시민들은 경찰서로 돌아가는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는 등 거세게 항의했고, 이를 폭동으로 오인한 경찰이 시민들에게 총을 발포했다. 그 결과 시민 6명이 사망했고 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경찰에 대한 비난 여론이 고조됐다. 양정필(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실제로 6명의 사망자 중 5명은 등에 총을 맞았다.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한 것”이라고 당시 경찰의 대응을 비판했다.

사건 이후에도 경찰 측은 별도로 진상을 규명하거나 사과하려 하지 않았고, 도민들은 항의의 의미로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도민들의 이러한 항의에도 경찰은 발포의 정당성만을 강조했다. 경찰서를 습격하려는 행위에 대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다. 이때 이뤄진 시민들의 대대적인 총파업의 규모는 상당했다. ‘3·10 총파업’에는 제주도청, 경찰과 같은 관공서를 비롯한 여러 민관 기관이 참여하는 등 도민 95% 이상이 동참해 ‘3·1절 발포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개중에는 남조선로동당(이하 남로당)과 같은 좌익 세력도 힘을 보탰다.



▲수용소에서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 [사진 출처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총파업 이후, 도민들에 대한 경찰의 탄압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삼팔선 이남 지역을 통치하던 미군정이 총파업의 주체를 남로당으로 오판한 것이다. 결국 제주도는 좌익 세력의 손에 넘어간 ‘빨간 섬’으로 규정됐다. 양유석(제주4·3연구소) 간사는 “유례없는 민관 총파업은 좌·우익이 모두 참여한 정당한 분노며 항의였지만, 미군정은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력보다 이를 남로당이 주도한 것으로 분석하는 등 제주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탄압을 위해 극우 세력인 서북청년회(이하 서청)*가 경찰로 제주도에 투입됐다. 극단적인 성향의 서청은 ‘빨갱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서슴지 않았고, 무고한 도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미군정의 지시로 서청의 투입 규모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이때 서청은 조선경비대(이하 경비대)**로 투입되기도 했다. 결국 무장봉기 전까지 1년여간 2,500여 명의 도민들이 체포됐으며, 구금자에게 이뤄진 경찰의 고문으로 청년 3명이 희생당했다.

이 같은 탄압이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자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에서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의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남로당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등을 대의명분으로 내걸었다. 무장대는 12곳의 경찰서와 함께 서청 등에 소속된 우익 인사의 가택을 습격했다. 양 교수는 “경찰 탄압에 대해 어떻게든 막고 저항해야 한다는 부분이 컸다”며 “많은 도민이 심적으로 동조했던 것 같다. 육지 경찰의 탄압으로 동네마다 젊은이가 고문받고 구타당해왔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인식이 좋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갈등은 무장대와 경비대가 같은 달 28일에 평화협상을 타결해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듯했으나, 사태는 일부 우익 집단의 테러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달았다. 초기에 경비대는 무장대와 협상을 통해 사태를 평화롭게 수습하고자 했다. 이에 호응한 무장대는 극적으로 경비대와 합의점을 찾는데 성공했으나, 사흘 뒤 일부 우익 세력이 민가에 불을 지르며 협상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또한 미군정이 강경 진압을 지시하며 사태는 도리어 확전됐다.

무장대는 제헌 국회의원선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등 봉기를 지속했다. 이들은 선거인명부를 빼앗고 선거와 관련된 공무원을 살해했다. 제헌 국회의원선거 당일에는 투표소를 공격해 투표용지를 파손하고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보내 투표를 막았다. 결국 투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제주도에서만 투표수가 유권자의 과반을 넘지 못해 당시 선거규정에 따라 선거가 무효로 처리됐다.

▲학살한 민간인의 시신을 짓밟고 선 군인들 [사진 출처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남한 단독 정부 수립 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제주도의 상황은 파국으로 향했다. 1948년 8월 들어선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태를 빠르게 진압하고자 했다. 남한 단독 선거를 반대한 무장대를 정부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10월 17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中山間) 마을을 통행하는 자는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됐다. 산에 숨은 무장대와 해안 마을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함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무차별적인 ‘초토화 작전’이 시작됐다. 중산간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해안 마을로 강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토벌대는 초토화 작전의 일환으로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도민들을 집단 학살했다. 일부 도민들은 토벌대 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무장대에 역으로 살해당했다. 해안 마을로 이동하라는 소개령이 떨어진 몇몇 중산간 마을에는 소식이 전달되기도 전에 토벌대가 진입해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특히 이 4개월간 토벌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1월 한 마을에서는 주민들을 운동장에 모아두고 학살해 이틀간 400여 명의 사람이 사망했다.

잔혹했던 사건이 마무리될 즈음 6·25전쟁이 발발하며 제주도의 아픔은 지속됐다. 좌익 세력을 색출하기 위한 예비검속이 이뤄지며 다시 한번 제주도가 피로 물든 것이다. 또한 전쟁 기간 중 제주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형당했다. 1954년 9월 21일, 마침내 중산간 마을에 내려졌던 통행금지령이 풀리면서 깊은 상처를 남긴 제주4·3사건은 일단락됐다.

갈등 속 실종된 인권과 평화

제주4·3사건이 휩쓸고 간 제주도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제주도민은 삶의 터전을 잃음과 동시에 이웃과 가족이 살해당했다는 깊은 상처를 떠안았다. 4만여 채의 집이 소실됐고, 중산간 지역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사라졌다. 마을 자체가 사라진 곳도 다수 존재했다. 생활 기반인 학교와 공공기관, 산업시설은 파괴됐다. 특히 토벌대와 무장대 양측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의 숫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달하는 25,000~30,0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념에서 시작된 제주도민의 씻을 수 없는 상처는 이념의 대립과 남북 분단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의해 다시 한번 방치됐다. 김종민(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은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은 ‘연좌제’와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등 온갖 치욕과 분노, 좌절과 체념을 겪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사건 종결 후, 50여년이 지난 2000년이 돼서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진상조사를 비롯해 국가폭력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사죄가 이뤄졌다. 양정심(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유족으로서는 나라가 부모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에서 의미가 있다”며 “진상규명으로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도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사죄하기 위한 공적인 근거도 마련된 것”이라고 전했다.

처리해야 할 숙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바로 ‘제주4·3’의 바른(正) 이름(名)을 찾아야 한다는 이른바 정명(正名) 논쟁이다. 즉 제주4·3의 역사적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양 간사는 “과거보다 많이 진전됐으나 제주4·3은 정명이 이뤄지지 못했으며, 폭동, 항쟁 등의 의견충돌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민간인 학살, 국가폭력, 제노사이드(집단학살)라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으나, 여전히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사건”이라고 평했다. 이어 양 교수는 “입장에 따라 폭동, 항쟁, 통일운동 등으로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제주4·3의 공식적인)명칭에 대해 모두가 인정할 수 있도록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연구들이 진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제주4·3사건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정신은 무엇일까. 제주4·3사건은 이념 등의 이유로 빚어진 갈등 상황에서 평화와 인권이 왜 지켜져야 하는지 보여준다. 양 간사는 “이념적 대립이 얼마나 무섭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적대시해서는 안 되며 상호 간의 이해를 바탕으로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을 지켜나가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김 위원은 “제주4·3사건을 통해 평화가 깨지고 인권이 유린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알 수 있다”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서북청년회 :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들로 구성된 극우 성향의 민간단체로 좌익 세력 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조선경비대 : 남조선국방경비대.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으로 광복 이후 국내 치안 유지에 부족한 경찰력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미군정하에서 창설된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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