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3년째 살고 있는 동네 길목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습니다. 미용실, 수선집, 정육점, 말은 나눠보지 못했지만 익숙한 어른들의 얼굴에 주름이 지고 흰머리가 나는 것을 어느 순간 자연스레 알만큼 저는 그들을 자주 보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한성문학상에 투고할 시를 쓰려고 생각하다가 문득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38회 한성문학상의 시 부문 응모작들을 세심하게 읽었다. 무엇보다 젊은 학생들의 패기와 깊은 사유, 신선하고 탄력 있는 상상력을 접할 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만 활달한 사유와 상상력에 어떤 얼개 같은 것을 두어서 시상을 조금은 구심적으로 조직화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전반적으로 있었다. 당선작 선정을 놓고 마지막까지...
수선집 이세현 골목 앞길을 지키고 있는 수선집 황씨 아저씨는 하루 종일 다리미로 꾹꾹 셔츠를 눌려펴다가 집에 가서는 누룽지를 팔팔 끓여 대충 먹고는 잠에 든다 다 헤진 메리야스가 매주 전화가 온다던 딸이 재작년 겨울부터 오지 않는 일을 알려주었다 송송 구멍이 뚫려 있는 아저씨의 가슴팍에 어둑한...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자극제는 이전 소설 부문의 수상작이었습니다. 남성중심적 판타지가 가미된 표현이 가을날 보도블록을 뒤덮은 낙엽처럼 흩뿌려져 있던 그 글은 충격이었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제가 파악하지 못한 풍자, 신랄한 비판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정상적인 남성성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정상성은 허황한...
38회 한성문학상 소설부문 응모작은 읽을만한 수준을 갖춘 작품들이 많아서 몇 번 살펴본 결과 「정상성 찬가」, 「복기」, 「사람의 질문」, 「껍데기」, 「긴 팔 옷의 남자」 5편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심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소설이란 모두 아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어서, 결국 써나가는 방식이 얼마나 독창적인가 하는 점이었다. 「정상성...
정상성 찬가 배지호 박경훈 씨는 자신의 안정적이고 화목한 가정에 제법 자부심이 있는 편이었다. 젊은 나이에 남부럽지 않은 회사에 취직하여 주변의 동경과 시샘을 한 몸에 받으며 큰 사고 없이 56세의 나이, 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아내와는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만났다. 그때 아내는 학교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었는데, 그런...
이번 한성문학상에는 총 40명의 투고자가 200편이 넘는 작품을 투고하였다. 규모로 보면 예전에 비해 다소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학생이 시를 쓰고 읽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가 대중들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데,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한편으로 뿌듯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아쉬움이 없는 것은...
식탁 위에 며칠이나 놓여 있던 바나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껍질까지 까맣게 변해갔습니다. 이대로 더 놔두면 너무 물러지고 썩어서 버려야 할 것 같은데 가족들은 아무도 그 바나나를 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이미 너무 볼품없는 모습이 돼버려서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냥 버리기에도 아깝고 그렇다고...
[삽화 : 김한나(패션3)] 방치 김도경 바나나를 주웠다 생각보다 노랗지 않았다 검었던 것 같다 껍질을 찢고 안을 들여다봤을 때 너무 오래 방치된 것은 그렇다고 달궈진 팬 위에서 잊혀갔던 토스트의 새까만 살을 씹다가 네가 말했다 그날 무식하게 겉면을 태운 슬픔이 긁어낼 가위도 없이...
아홉 편의 응모작 중 「가족」, 「친구」라는 범주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 작품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지난 2~3년간 우리의 삶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전염병의 긴 터널을 지나 온 여파도 있을 것입니다. 소설은 삶을 반영한다는 평범하고도 변함없는 원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심사 기간은 작가 지망생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군대에서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사회로 나갈 수 없다는 답답함이 소설 쓰기에 힘을 실어 주었다. 평소 문학을 좋아했지만, 그 마음은 독자로서의 경계선 안에 머물렀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뭉근하게 차오른다. 때마침 국방부에서 간부와 용사를 대상으로 병영문학상을 개최한다는 포스터를 접할 수 있었고,...
월세구하기 김남수 이른 아침 햇빛들이 동네 구석구석 한자리씩 차지한다. 그런데 빽빽이 메워진 빛이 닿지 않는 곳에 편의점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맞은편 아파트가 암막 커튼처럼 빛을 막아서고 있다. 허름한 상가에 홀로 번쩍번쩍 간판 불빛을 자랑한다. 편의점과 상가 건물은 마치 봉제 인형과 로봇을 억지로 합체시켜 만든 듯한...
[삽화 : 이수린(ICT 2)] 아이보리 최현아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환승길 풀내에 이끌려 따라간 작은 꽃집 노란 꽃 파란 꽃 널린 깡통 사이 희미한 튤립 한 송이가 말을 걸어온다 혼잣말처럼 들릴 듯 말 듯 이름없이 죽어가는게 슬프다고 나는 우울한 꽃을 집어올려 계산대에 얹고 삼천원을...
최현아(ICT 4) 제 시가 가작으로 선정되었다는 메일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기쁨은 약이 되기도 하네요. 아픈 몸으로 아르바이트를 겨우 마치고 돌아와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약발이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내용을 자꾸 다시 확인하다보니 어느새 아픈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사실 중고등학교...
조윤식(서양화5) 제가 쓴 시로 처음 수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선물과도 같은 이 경험에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시를 쓴지는 2년 정도 되어갑니다.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죠. 그전에는 시를 쓴다는 게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려워서 쉽게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남들에게 딱히 하고 싶은 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