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6·10만세운동, 독립운동의 새 페이지 (한성대신문, 601호)

    • 입력 2024-06-1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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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4-06-17 00:01
▲6·10만세운동 현장에서 참여자들이 모여있다. [사진 제공 :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국가에 등록된 독립운동가 수만 자그마치 1만 8천여 명에 달한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중에는 그 이름이 역사에 기록돼 널리 알려진 이들도 많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도 존재한다. 6·10만세운동과 같은 시민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벌어지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한 ‘학생’ 독립운동가가 그러하다. 학생 독립운동가들의 독운동은 6·10만세운동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당시 학생들을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이 6·10만세운동을 벌인 배경은 무엇인지, 지금의 우리가 6·10만세운동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1919년 3·1운동이 벌어진 이후 일제는 한반도를 통치하는 방식을 바꿔, 독립운동 세력에 분열을 일으키고 독립운동의 열기를 쇠퇴시켰다. 일제는 3·1운동 이전까지 헌병경찰을 동원하는 등 무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조선인을 강하게 억압하는 ‘무단 통치’를 자행했으나, 전국에서 수많은 시민이 참여한 3·1운동이 벌어지자 통치 방식에 변화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에 일제는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는 제2차 『조선교육령』의 제정을 시작으로 ‘민족 분열 통치’, 이른바 ‘문화 통치’로 노선을 변경했다.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표면상 유화책으로 보이는 정책을 펼쳤지만, 조선인을 억압한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회유를 통해 독립운동 세력 안에서 친일파를 양성하고 분열을 야기하는 등의 공작도 변화된 통치 방식의 일환이었던 것이 그 일례다. 조규태(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는 “독립의 방법을 찾던 일부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들이 일제와 타협하자는 ‘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으로 변질됐다”고 말했다.
민족주의 사상을 기반에 둔 독립운동 세력이 주를 이뤘던 1920년대 초, 사회주의 사상이 해외로부터 유입됐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창당됐고, ‘고려공산청년회’와 같은 청년·학생단체가 함께 활동했다. 사회주의가 국내에 유입된 이후 두 독립운동 세력은 연대하기보다는 각자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며 마찰을 빚기도 했다. 강윤정(국립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이념 차이로 마찰을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분파가 일어났다”고 밝혔다.
일제가 제한적으로 허용한 결사의 자유와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은 학생단체에게 지대한 영향을 줬다. 3·1운동의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벌인 서울 지역 고등보통학교*나 전문학교**의 학생들은 ▲조선학생회 ▲조선학생대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학생단체를 조직했다. 다수의 조직은 학문 연구를 표방했지만, 그중에는 식민 지배 종식을 위해 필요한 노력이 무엇인지 비밀리에 고민하는 학생단체도 존재했다. 강 교수는 “몇몇 학생단체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성장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26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서거했고, 조선공산당은 장례식 당일인 6월 10일 ‘제2의 3·1운동’이라 불릴만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고려공산청년회의 권오설은 조선공산당의 동의를 얻은 후, ‘6·10투쟁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후 3·1운동 이전부터 독립운동을 벌여온 천도교 등과 연대를 추진하고 격문을 인쇄·배포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독립운동 세력의 계획은 거사 직전인 6월 7일 일제에 발각됐으나, 학생들이 일제의 눈을 피해 준비를 이어 나가며 6·10만세운동은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만세운동 준비에 관여했던 기성 독립운동 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고 격문이 압수돼 6·10만세운동은 무산될 위기에 처했지만, 일제의 감시를 피한 학생들이 새로 격문을 인쇄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한 것이다. 이승철(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이사는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을 외치는 짧은 격문을 인쇄해 현장에서 배포하거나 우편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종로3가를 지나는 순종의 상여 [사진 제공 :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장례식 당일인 6월 10일, 2만 4천여 명의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위해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부터 홍릉(현 홍릉시험림 자리) 일대까지 늘어섰다. 순종의 상여가 종로3가를 지나던 오전 8시 30분 무렵 중앙고등보통학교(이하 중앙고보) 이선호 학생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중앙고보 학생 300여 명이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와 격문을 배포하면서 6·10만세운동은 시작됐다.
서울 전역으로 퍼진 만세운동은 지방 출신 학생들의 구전 등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됐다. ▲인천 ▲군산 ▲대구 등 일부 지방 도시에서도 연쇄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조 교수는 “지방 출신 학생들과 천도교, 조선공산당 등의 지방 조직을 통해 만세운동 관련 정보가 퍼져나갔다”고 전했다.
시위가 더욱 크게 확산되지 못하도록 일제는 7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만세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서울에서만 학생 210여 명, 전국적으로 1천여 명의 학생이 검거됐다. 이들 중 106명은 취조를 받았으며, 53명이 수감됐다. 강 교수는 “일제 당국은 보병, 기병, 포병 전력을 배치해 무차별 진압에 나섰다”며 “중앙고보의 학생 중 1명은 검거 과정에서 매를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재판을 받는다. [사진 제공 :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수감된 53명의 학생들 중 11명은 재판에 넘겨졌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11월 2일에 진행된 재판에서 학생들은 만세운동의 동기와 목적 등을 진술했다. 처음으로 만세를 부른 이선호 학생은 재판장에서 만세를 외친 이유에 대해 “자유를 부르짖으면 반드시 자유가 온다는 굳은 신념 아래 자유를 얻기 위해 만세를 외친 것”이라고 말했다. 검사의 상고 끝에 1927년 3월 25일, 이 학생을 포함한 10명에게 징역 1년, 준비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1명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실형이 확정된 것을 끝으로 6·10만세운동은 일단락됐다.


전문가들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뉘어 있던 독립운동 세력이 6·10만세운동을 계획하는 과정에서만큼은 연대했기에, 6·10만세운동이 독립운동 세력 통합의 시작점이라고 전한다. 비록 거사 이전에 일제에 발각됐으나, 초반에 만세운동의 계획을 수립할 당시 천도교 등 민족주의 진영과 조선공산당과 같은 사회주의 진영이 단결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국내외로 퍼진 6·10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은 독립운동 세력이 비타협적 노선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6·10만세운동 이후에도 독립운동 세력은 통합의 이념을 이어받아, 민족주의 진영 일부와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해 ‘신간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1일 창설된 일제강점기 최대 항일 결사 조직으로, 각종 활동을 통해 국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강 교수는 “신간회는 독립운동 세력 간의 화합이 필요하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결성된 조직”이라며 “여러 독립운동을 지도하며 국내 민족운동의 중심에 섰다”고 언급했다.
6·10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을 포함한 당대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단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학생 주도의 독립운동이 늘어났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6·10만세운동 이전까지의 학생단체는 서울 지역에서만 주로 나타났다. 학생운동 또한 비계획적으로 교내 문제를 다루는 데 그치는 등 한계가 있었다. 6·10만세운동 이후에는 학생단체가 지방으로 확산됨에 따라, 학생운동은 또한 체계를 갖추고 거시적으로 진행되는 등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강 교수는 “3·1운동 시기 전위(前衛)적 역할을 담당했던 학생층이 6·10만세운동에서는 독자적 주체로 성장함으로써 학생운동이 독립운동의 주류로 부상했다”고 전했다.
학생단체와 학생운동의 활성화는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된 학생운동으로, 확산 과정에서 신간회가 크게 기여했다.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전국에 확산된 학생조직을 통해 학생운동이 성숙해진 것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밑바탕이 됐다. 이 이사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한 광주 지역의 학생단체인 성진회가 6·10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6년 11월 3일 결성됐다”고 설명했다.
사학계에서는 6·10만세운동이 3·1운동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민족 단결과 학생운동의 발전 측면에서 의의는 크다고 강조한다. 강 교수는 “6·10만세운동은 3·1운동만큼 크게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사에서 값진 열매를 맺었다”며 “6·10만세운동이 만든 청년·학생운동의 전통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져 민주화운동으로 계승·발전됐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고등보통학교 : 일제가 설치한 중등교육기관으로, 오늘날 중·고등학교에 해당
**전문학교 : 근대 이후 도입된 고등교육기관으로, 오늘날 전문대학에 해당

김유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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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민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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