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기자와 떠나는 문화여행> ‘악’이 행하는 ‘의’는 정의인가 (한성대신문, 568호)

    • 입력 2021-06-07 00:01
    • |
    • 수정 2021-09-27 13:37

<편집자주>

요즘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OTT 서비스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는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똑같은 생각을 갖지 않는다. 작품의 온전한 의미는 보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해석은 여러분의 몫이다. 나만의 해석을 찾기 위해, 문화 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정의를 선하다고 여긴다. ‘정의로운 사람’하면 타인에게 친절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그리고 악한 사람은 당연히 정의롭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만약 악한 사람이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연 악인이 행하는 정의는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네 번째 여행지는 악인이 정의를 행할 수 있는 세상이다.

신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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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빈센조> 공식 스틸컷

한 남자가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남자의 발걸음은 테이블에 앉은 이탈리아인을 향한다. 남자는 보스의 명에 따라 그에게 빼앗은 농장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고 되려 ‘미개한 동양인’이라며 남자를 모욕한다.

남자는 뒤를 돌아 계단을 걸어 내려온다. 하늘을 올려다 본 남자의 시선 끝에는 경비행기가 있다. 비행기가 드넓은 농장 위로 기름을 뿌린다. ‘딸깍’ 라이터 뚜껑을 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남자는 불붙은 라이터를 등 뒤로 던지고 유유히 저택을 걸어 나간다. 라이터의 불씨는 기름에 젖은 작물을 타고 삽시간에 농장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사방을 뒤덮는 화염 사이로 남자를 태운 차가 빠져나온다. 남자는 드라마 <빈센조>의 주인공이다.

▲자신을 해치러 온 악인들을 쏴죽인 남자

나쁜 놈 위에 더 나쁜 놈

드라마 <빈센조>에는 ‘절대 악’으로 분류되는 악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건설, 제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 건설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건물을 강제로 철거하면서 건물 주민들의 안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주민들의 반대로 건물 철거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가스 점검을 나온 척 건물을 방문해 가스를 누출시키고 폭탄을 설치하기도 한다.

또, 신약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연구원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아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희생자를 위한 추모나 보상은 커녕 약품이 인체에 해롭다는 사실을 은폐해 버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법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정의롭지 않은 법조인과 결탁해 법의 빈틈을 찾아 요리조리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극중 등장인물들은 물론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들까지 분노하게 한다.

그때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악인들이 인체에 유해한 약품을 출시하려 하자 약품 저장 창고를 통째로 폭파시키고 제약 회사 회장의 별장에 들어가 살인 예고를 남긴다. 악인들의 마수가 남자의 주변인에게까지 미치자 그들의 집에 무단 침입해 손톱을 뽑고, 불을 지르고, 머리에 총을 쏴 죽이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남자는 ‘절대 악’의 무리에게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주고, 궁지에 몰아 천천히 죽음에 도달하게 한다. 법이 처벌하지 못한 악인들을 응징하는 남자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속이 뻥 뚫리는 듯한 통쾌함을 선사한다.

▲남자가 지른 불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악인

히어로를 원한 사람들

남자는 ‘절대 악’의 무리와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약자의 편에 선다. 그러나 남자는 그들에게 대항하는 수단으로 ‘선’이 아닌 ‘악’을 선택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의 처벌 방식은 더 잔인해진다. 종국에는 긴 창이 서서히 몸을 관통하는 장치에 악인을 넣어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이기까지 한다. 이같은 모습을 보면 남자는 폭력적이고 잔인무도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남자의 행동에서 통쾌함을 느끼는 걸까?

약자를 위하는 선한 마음과 악한 처벌방식. 드라마 <빈센조>의 남자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전형적 ‘다크히어로’의 면모를 보인다. 다크히어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슈퍼맨, 어벤져스 등 일반적인 히어로 와 달리 오로지 ‘처벌’ 자체에만 주목한다.

우리 학교 권상집(사회과학부) 교수는 “사회의 부조리가 심해지면 그로 인해 대중이 받는 사회적 스트레스가 누적된다. 이때 다크히어로가 보여주는 강력한 처단과 응징은 현실 문제로 스트레스가 쌓인 대중에게 대리만족감을 준다”고 말했다.

우리는 드라마 속 악인들에게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투영한다. 최순실 게이트부터 LH 사태까지 검찰 및 정·재계 인사의 부패로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일이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처벌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같은 현실을 생각하면 악의 무리를 처벌하는 ‘다크히어로’인 남자를 ‘히어로’처럼 추앙하게 된다.

▲남자의 계략으로 돼지 피를 뒤집어쓴 악인

정의의 탈을 쓴 악

그렇다면, 남자의 행동을 ‘정의’라 할 수 있을까? 사전에서는 정의를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혹은 ‘사회 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로 규정한다. 누군가는 남자가 절대 악을 응징하고 사회 평화를 도모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정의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악인을 응징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양심은 물론이고 사회 규범까지 무시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시민이 범죄자를 직접 응징하기 위한 현실판 다크히어로가 등장한 사례가 있다. 악성범죄자들의 신상정보를 불법으로 공개하는 웹사이트 ‘디지털 교도소’다. 법이 사회악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니 대중이 사회적 심판을 가해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발생 후 디지털 교도소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유튜버가 알고보니 실제 가해자와 동명이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거짓 제보에 속아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다. 정의를 빙자한 보복이 만든 단편적인 예다.

드라마 <빈센조> 속 남자도 법의 울타리를 벗어난 방법으로 정의를 실현하려 한다. 그런 남자에게 드라마 속 악인은 “나를 죽이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나? 사회적인 메시지가 되나? 그냥 쓰레기가 쓰레기 죽이는 게 된다”고 말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틀린 구석은 없는 말이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선 안 된다’라는 말처럼 잘못된 방법으로 악을 처단하면 정의구현은 커녕 오히려 스스로가 더 큰 악으로 남는다. 의도가 선하든 악하든, 폭력 및 범죄는 정당화 될 수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개인의 선한 마음, 도덕성을 가지고 모두가 이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악인이 법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또 다른 악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법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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