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한성문학상 - 소설 부문 당선작> 월세 구하기

    • 입력 2022-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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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2-12-05 00:00
[삽화 : 김소형(ICT 1)]

월세구하기

김남수

이른 아침 햇빛들이 동네 구석구석 한자리씩 차지한다. 그런데 빽빽이 메워진 빛이 닿지 않는 곳에 편의점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맞은편 아파트가 암막 커튼처럼 빛을 막아서고 있다. 허름한 상가에 홀로 번쩍번쩍 간판 불빛을 자랑한다. 편의점과 상가 건물은 마치 봉제 인형과 로봇을 억지로 합체시켜 만든 듯한 괴상함을 자랑했다.
그 편의점에서 표정을 잃어버린 얼굴로 의자에 기대 아침 근무자를 기다리고 있는 강희가 있었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후드티를 입고 오른 손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다. 편의점에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 손님이 들어왔다. 중년 남성은 곧바로 카운터 앞에 서서 담배를 찾았다. 강희는 담배를 꺼내 계산대 앞에 내려놓는데, 중년 남성은 카드를 손에 쥔 채 멈춰있었다. 한참이나 멈춰있는 손이 이상하여 손님을 쳐다본 강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년 남성은 강희의 헐렁한 옷 때문에 슬쩍 보이는 가슴골을 간절히 훔쳐보고 있었다.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강희는 힘 풀린 눈으로 티셔츠에 손가락을 걸고 목 부분을 훅 내려버렸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브래지어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가슴 덩이에 놀란 중년 남성은 순간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듯 편의점을 뛰쳐나갔다. 강희는 무력감을 꿀꺽 집어삼키며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는 중년 남성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곧이어 도착한 오전 근무자와 검박한 인사를 나누고 편의점을 나왔다. 편의점에서 나온 강희는 이어폰을 끼고 주변 세상과 절교한다. 이른 아침 주택가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출근한다. 강희는 요즘 회사들은 캐주얼한 복장으로 많이 일하니까 후줄근한 후드집업에 운동복 바지인 자신도 회사원처럼 보이지 않을지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스스로를 비웃듯 피식 웃음을 뱉었다.
27분을 걸은 뒤 집 앞에 다다랐다. 계단을 오르며 옥탑방으로 향한다. 밤을 새우고 난 뒤라 온몸에 힘이 빠진 강희는 계단 한 칸 한 칸의 경사가 더욱 가파르게 느끼고 있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 하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강희의 어깨를 붙잡아 돌리며 소리쳤다.
“강희 학생!”
갑작스레 뒤도는 바람에 이어폰이 바닥에 나뒹굴러졌다. 멍한 상태에 빠져있던 강희는 아줌마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마치 얇은 바늘이 쑤욱하고 들어오는 듯 아파했다. 강희 앞에는 풍채 좋은 주인집 아주머니가 단단히 서 있다.
“얼굴 보기 힘드네 잘 지냈고?”
“네... 뭐”
“다름이 아니고 월세 말이야... 많이 밀린 거 알지? 생활비 때문에 보증금도 빼갔잖아” 주인집 아주머니는 강희의 말을 자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십팔만원이야 밀린 월세...이거 사흘 안으로 갚아줬으면 해”
“... 사흘이요?” 강희는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있었다.
“사실 강희 학생이랑 계약도 며칠 뒤면 끝나잖아 그런데 계속 이렇게 월세 밀리면 우리도 사정이 있으니까 재계약은 어렵지” 주인집 아주머니는 단호했다.
“그래서 이번에 강희 학생이 재계약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으면 사흘 안으로 밀린 돈 다 갚아줘 그러면 우리도 재계약할 테니까”
주인집 아주머니는 자신의 말만 내던지고 내려갔다. 강희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옥상에 우두커니 남겨졌다. 바닥에 떨어진 이어폰에는 도시의 세련됨을 찬미하는 시티팝 음악이 가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
대학을 입학한 강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아르바이트였다. 부모님의 그늘은 강희에게 드리워진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매일 밤 비명을 지르듯 아버지를 쏘아붙였고, 그는 무력함으로 일관했다. 강희는 집에서조차 이어폰으로 귀에 소리를 가득 채워 넣어 잠을 청해야만 했다. 괴로움이 권태가 되어 갈 때쯤 집을 나와 연락을 끊었다. 부족한 환경은 노력으로 메우기 위해 노력했고 우는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한 번 터져 나오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꾹 눌러 담았다.
그날은 유독 피곤함을 느꼈다. 4학년 2학기에 접어든 강희는 중간고사 기간이었고 늘 그렇듯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마치 한숨을 불어넣으면 터질 듯한 풍선 같았다. 숯불고기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강희는 가게 뒤편 숯불 착화기 앞에 쪼그려 앉아 숯불을 꺼내고 있었다. 숯불의 온기는 강희를 노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강희는 집게에서 숯불을 놓쳐 바닥에 자주 구르게 했다. 그러다 손님 테이블로 숯불을 교체하러 가기 위해 쪼그려 앉은 다리에 손을 짚고 일어나려는데 느슨해졌던 몸은 다리까지 힘을 옮기지 못했다. 순간 강희는 엉덩방아를 찧고 손을 바닥에 집는 과정에서 숯불에 손을 푹 담갔다. 타들어 가는 오른손의 고통이 이 순간을 생생히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 고통은 며칠 만에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날 이후로 강희는 꽤 오랜 기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수입은 끊기고 병원비는 줄줄 새서 통장 잔고를 바싹 마르게 했다. 월세가 밀리게 된 것도 이 시점부터였다. 화상은 강희의 손뿐만 아니라 중간고사에 쏟은 모든 노력을 불태웠다. 중간고사 마지막 날 경영대에서 중간고사 종강 기념으로 술자리를 마련했다. 강희는 이 무력함을 다른 어떤 것으로든 덮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느꼈다. 오후에 시작한 술자리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중간고사 스트레스를 푸는 대학생들은 활기찼고 여기저기 목청이 터져라 게임을 하고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강희의 테이블은 알박기를 하는 듯 주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바쁘게 사는 탓에 동기, 후배들과 안면이 없었던 강희는 혼자 술로 시간을 채우며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몇 번의 반복 끝에 시간은 어느덧 새벽이 되었고,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강희의 맞은편에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성훈으로 강희의 2년 후배였다. 성훈은 강희에게 둘이서 마시자고 추근댔다. 하지만 강희는 모든 게 지루했고 지루하다는 게 지겨웠다. 늦어진 시간이 귀가를 상기하도록 부추겼고 강희는 혼자 술집에 온 것처럼 가게 밖을 나섰다. 뒤이어 성훈도 가게를 따라 나왔다. 강희는 비틀거리며 걷고, 성훈은 뒤를 따랐다. 그날 거리는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아 있었다. 거리에는 남녀들이 서로 몸에 걸친 것들과 몸매를 자랑하는 옷을 전시하고 있었다. 강희에게 그 광경은 새벽 수산시장의 경매장처럼 하룻밤을 경매 상품으로 가격을 매기는 것처럼 보였다. 뒤를 바싹 따라오던 성훈을 보며, 남들이 볼 때 자신과 성훈도 그렇게 보일까 생각했다. 하룻밤이 간절하면서도 품위는 지키려는 모습들이 우스웠다. 앞장서 가던 강희가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성훈은 물었다.
“왜 웃어?” 강희는 뒤돌아 성훈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주위를 한 번 쭉 봐봐! 웃기지 않아? 다들 폼 잡고 비싼 척들 하는데, 다 섹스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잖아 웃겨!”
술에 취한 강희는 붕대를 한 손으로 성훈을 탁탁 치며 웃었다. 성훈은 그런 강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재미있으면... 우리도 할까?”
성훈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희를 쳐다보았다. 심하리 솔직한 성훈에게 불량한 내음새가 풍겼다. 강희는 순간 오른팔이 따끔거려 손을 올려 붕대 속 더럽게 흉진 팔을 꿰뚫어 보았다. 얼마간 멍하니 다친 손을 들여다보다 심상하게 대답했다.
“... 그래”
성훈은 놀라 다시 물었다.
“어? 진짜?! 진짜로? 좋다는 거지?”
흥분한 성훈에 비해 강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친 손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무심히 대답했다. “어... 하자고”
성훈은 신이 나서 방방 뛰었고 곧이어 자신이 아는 모텔이 있다며 그곳을 안내했다.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모텔에 들어갔다. 성훈은 득달같이 옷을 벗으며 누워 있는 강희 위에 올라왔다. 두 사람은 싸우듯 섹스하기 시작했고, 그 밤 성훈은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강희를 대했다. 강희는 얼마든지 망가지기를 원했다. 한바탕의 난리 후에 성훈은 담배를 태우며, 모텔 방 안에 있는 PC로 게임을 즐겼다. 강희는 성훈이 좋은 남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강희는 오래간만에 노곤하게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 오후 늦게 일어난 강희는 온몸이 뻐근했다. 부스스한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성훈은 보이지 않았다. 강희는 공허를 보는 듯한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내 부스럭대며 옷을 입는데 방안 정적에 최소한의 소리가 입혀졌다.
22분을 걸어 학교에 도착한 강희는 수업 시간에 약간 지각했다. 강의실은 시끌시끌한 분위기로 수많은 말소리가 문을 두드리듯 오가고 있었다. 강희가 문을 열고 강의실로 들어서는데, 순간 진공 상태가 되어 말소리가 멎었다. 사람들은 입구 쪽을 쳐다보고 강희는 순간 숨이 막혀 헛기침을 해 목을 뚫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다시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교수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강희는 구석 자리에 홀로 앉아 교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강희와 동기 여학생 세 명이 강희에게 다가와 말을 내쏘았다.
“강희야! 너 성훈이 알아?”
“어? 성훈...?” 강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 성훈! 그냥 뭐... 알긴 알아 왜?”
무리의 왼쪽 끝에 있는 여학생이 말했다.
“너 성훈이 민영이 남자친구인 거 몰라?”
강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모르는데... 민영이가 누군데?”
양쪽 끝에 있는 여학생들은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분위기를 보건대 가운데 흰 와이셔츠의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발목까지 긴 치마를 입은 사람이 민영이 같았다.
“너 어제 성훈이랑 모텔 들어가는 거 본 사람 있어! 너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민영이 남자친구를 건드리냐?”
무리의 여학생은 마이크가 필요 없을 정도의 소리로 말했고, 어느 순간 강의실에 모든 이들이 강희를 주목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강희가 강의실에 들어선 순간부터였다. 내놓고 망신을 주려는 건지 낙인을 찍으려는 건지 작정을 하고 달려들었다. 강희의 오른팔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통증이 깊숙이 파고들어 견디기 어려웠다. 강희는 덤덤한 목소리로 운율을 띄웠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잤으면 너희들이 어쩔 건데?”
그리고 욱신거림이 심해지자 강희는 딱지를 긁어내 상처를 더 짙게하듯 외쳤다.
”그리고 왜 너희들이 난리야 당사자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데!”
강희의 외침은 강의실의 모든 주의를 이끌었다. 그때 뒤편에 우두커니 서 있던 민영이 말했다.

“너 잘한 거 없잖아...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니야?”
민영의 목소리는 부러질 듯, 가늘게 흘러나왔다. 너무 작은 소리였지만 강의실의 정적이 등을 밀어주어 크게 울렸다.
“너 남자친구 잘하더라, 혼자 독식하지 말고 나눠 먹자!”
강희는 눈을 부릅뜨고 악에 받친 듯 말했다. 그 말은 내뱉자 강의실은 공기는 급변하여 무겁게 눌러앉았다. 민영은 그 말은 감당하기에 너무 여렸고, 무리의 여학생이 강희에게 뺨을 때렸다. 그 소리는 청아하게 강의실에 울려 퍼졌고, 뒤이어 정적이 뒤를 이었다. 강희의 볼은 벌겋게 달아올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른팔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강희는 그날을 기점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 사건은 바람을 타고 학교에 널리 퍼졌고 무료한 학교생활에 좋은 씹을 거리가 되었다. 강희와 걸레라는 단어는 동의어가 되었다.

***

강희가 연락한 사람은 과거 돈을 빌려준 세 명의 남자였다. 제일 먼저 연락한 철우의 자취방은 서울의 한 반지하에 자리했다. 오랜만에 만난 철우와의 만남은 담백했다. 철우의 머리는 짧게 잘려있었는데, 이튿날 해병대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군 입대를 앞두고도 철우는 꽤 괜찮아 보였다. 과거에는 새하얀 소년 같던 철우는 소년티는 벗어버린 듯했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들이 옷 위로 울룩불룩 자기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강희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철우야! 미안한데 나 시간이 별로 없어서... 내가 너한테 생활비 빌려줬었잖아 그거 갚아줄래?”
“응 알았어!” 꽤나 씩씩하게 대답했다.
철우는 6평 남짓한 단칸방 구석에서 천으로 덮여있는 물건 앞에 섰다. 철우는 천을 걷어내더니 사람 크기만 한 털북숭이 인형 탈을 보여줬다.
“이게 쿠케리라고 불가리아 전통 인형탈이야!”
쿠케리는 온몸이 긴 털로 뒤덮여있어 마치 설인과도 같았는데 머리가 길쭉하게 뻗어있어 천장에 닿았다. 강희는 그 거대한 인형탈을 보고 어떤 단어를 선택해서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내가 핼로윈 데이 때 이태원에 입고 갈려고 제작 업체에 의뢰해서 만든 거야! 이게 불가리아에서 악귀를 쫓아내는 거야! 한국의 정승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철우의 물색없는 설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강희는 무력감과 분노가 적절히 배합된 눈으로 철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걸 돈이라고 주는 거야...?”
가라앉은 분위기에 주눅이 든 철우는 쭈뼛대며 말했다.
“저기 그게... 나 내일 군 입대하잖아 그래서 통장에 있는 돈 다 털어서 비싼 음식점도 가보고, 술도 돈 생각 안 하고 부어라 마셨더니 다 써버렸어...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나 싶어서...”
철우는 점점 기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거 내가 아는 형한테 말해놨거든 그 형한테 가서 말하면 중고로 살거야 번호 보낼게 그래도 대책은 마련해놨으니까... 내일 만날 수 있다는데 내가 내일은 입대라... 그래도 꽤 비싼 거라서 많이 받을 수 있어 제작한 거라...”
강희는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깊은 한숨이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삐져나왔다. 황당함을 뒤로 한 채 어쩔 수 없이 쿠케리를 갖고 집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철우가 강희에게 말했다.
“강희 누나!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철우는 떨리면서도 심지 박힌 목소리로 말했다. 강희는 냉랭하게 철우를 바라보았다.
“나랑 오늘 같이 있으면 안 돼?”
강희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아 되물었다.
“같이 있자고...?”
철우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동시에 묘한 떨림을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응 맞아 오늘 나랑 같이 있자”
강희는 그제야 철우의 말을 이해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헛소리하지 마 나 갈게”
강희가 냉담하게 반응하고 돌아서 나가려 하자 철우는 바닥에 무릎을 강력하게 입 맞췄다.
“나랑 한 번만 하자 우리 사귀면서 한 번도 못했잖아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하자”
철우의 황당한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야! 그때 못했다고 지금 하자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우리가 뭐 사귄 거라도 돼? 그냥 몇 번 만난 거지!”
강희에게는 비어있는 시간을 채우기 위한 만남이었지만 연애 경험이 전무했던 철우에게는 무게감이 남달랐다.
“그러면 지금 사귀면 되지... 제발 한 번만 하자! 나 누나랑 데이트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강희는 철우의 어이없는 공세에 황당했지만 한편으로 실소가 터져 나올 뻔한 것을 참아냈다. 그리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 내일 군대 가잖아?”
철우는 강희를 설득하려 아무 말이나 급하게 내뱉었다.
“누나! 요즘 군대 많이 짧아졌어! 십팔 개월이야! 십팔!”
강희는 들은 체 만 체 하고 차갑게 뒤돌아 집을 나서려 했다. 철우는 다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잖아! 내일 군대 가면 벌써 반한 거야! 다 끝났어!” 철우는 거의 울먹이면서 말했고 강희는 다리를 빼내려고 했다. 바지를 내려 삼각팬티 차림의 철우는 강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호소했다.
“그러면 누나 사귀지는 말고 지금 한 번만 하자! 나 어차피 처음이라 금방 끝나!”
강희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포기해... 안 되는 거 앞에서 그렇게 아등바등할 필요 없어”

강희는 철우를 뿌리치고 거대한 쿠케리를 들고 자취방 문을 나왔다. 그 인형을 두 손에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 인형은 너무 커서 몇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었다. 해결책을 떠올리려 고민하던 강희는 쿠케리 인형을 입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쳐다보고 관심을 가졌다. 한참을 뒤뚱거리며 겨우 집 옥상에 도착한 끝에 인형을 벗는데 땀으로 샤워한 듯 온몸이 젖어있었다. 강희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옥상 바닥에 누웠다. 이 상황에 대해 곱씹어보는데 웃음이 터져 나왔다.
***
다음 날 강희는 노량진 학원가에서 만수를 만날 수 있었다. 노량진 학원가 사람들은 모두 개성을 발라낸 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만수가 강희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희는 노량진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았기 때문이다. 만수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추레한 모습으로 군중 속에서 튀어나왔다. 강희를 보자 능글맞게 인사를 건넸다. 공무원 준비를 하는 만수는 노량진의 원주민이 된 듯 거리에 어울렸다.
“오랜만이다! 더 이뻐진 것 같네!”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 톤과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여기 근처에 괜찮은 커피숍 있거든 거기 가서 얘기나 좀 하자! 요즘 커피숍에 사람들이 공부만 하러 와서 수다 떨기가 힘든데 거기는 안 그래!”
강희는 제안한 사람이 민망하게 거절했다.
“아니야... 나 저녁에 또 누구 만나러 가야 해 빌린 돈만 빨리 줘”
“아... 그래? 바쁘구나 그럴 수 있지 바쁜 게 좋은 거야 그치?”
만수는 시시껄렁한 말로 무언가를 무마하려는 듯 보였다.
“저기.. 그게 내가 돈을 쓸데가 좀 많아져서 학원비다 책값이다 뭐다 해서 그래가지고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을 너한테 주면 네가 중고로 팔면 되거든...”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에 강희는 낮은 탄식을 뱉으며, 고개를 살짝 돌려 이 상황의 불쾌함을 표현했다. 그 반응을 보자 만수는 다급해져서 말했다.
“어제 급하게 전화받은 거라서 내가 신고 다닐 신발 준비를 못 했어! 미안 미안 그래도 자취방 가면 슬리퍼라도 있으니까 그거라도 신을게 진짜 미안하다”
만수는 입은 가벼운 솜털처럼 작은 바람에도 계속해서 펄럭였다.
“이거 그래도 비싼 거야 발렌시아가 트리플 S 거든 중고지만 그래도 몇십만 원은 받을 수 있어!”
만수는 오래 아껴 신은 듯 꼬질꼬질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저 신발을 중고로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두 사람은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만수는 무인도에서 표류하다 사람을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과 반가움이 뒤섞인 얼굴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노량진 와본 적 있어? 여기가 공부만 하는 곳이라 재미없다고들 생각하는데 막상 또 그렇지만도 않아! 재밌는 거 되게 많아 공부 스트레스 풀기도 해야 되니까!”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만수를 두고 강희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만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늘어놓았다.
“PC방, 노래방, 게임방 이런 것도 다 있어! 그리고 이런 말 하기는 좀 뭐 한데 스터디 있잖아! 그게 사실 섹터디라고 불려!”
만수는 상대가 듣고 있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아 보였다.
“공부 스트레스를 제일 잘 풀 수 있는 게 뭐겠어? 그거지 그거! 그러니까 다들 공부도 하고 욕구도 해소하고 일타이피를 노리는 거지!”
하지만 강희는 이런 얘기에도 이상하리만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강희 너 길티 플래저 알지? 딱! 그 느낌인 거야! 짜릿하다니까! 시험기간에 하는 게임이 제일 재밌잖아! 그래서 여기 놀 거리들이 그렇게 재밌어! 그리고 자취방 거리만 지나가면 소리가! 소리가! 난리라니까!”
쉴 새 없이 떠드는 와중에 만수의 집에 도착했다. 만수의 자취방은 고시원이었다.
“여기야 여기 8층 올라가자”
만수는 앞장서 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강희는 꼭대기 층에 있는 만수의 창문으로 보이는 것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고 음악을 껐다.
만수의 고시원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 있었다. 겨우 8층까지 오른 후 숨을 몰아쉬는데, 만수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강희에게 말했다.

“쉿! 여기서부터는 조용히 해야 돼! 따라와!”
만수와 강희는 신발장에 신발을 벗어 넣었다. 강희는 낯선 분위기에 눌려 만수의 지시를 따르게 됐다. 두 사람은 숨죽이며 방으로 향했다. 만수의 방은 집 하나를 압축한 듯 물건이 오밀조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강희는 마치 앨리스가 몸이 커지는 약을 먹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강희 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만수가 상체를 숙인 채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있었다. 강희는 멍한 표정으로 만수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뭐해...?”
강희의 물음에 만수는 멈칫하여 상체를 숙인 상태에서 고개만 들어 멍청하니 강희를 보았다.
“어..? 이거 아니야?”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오랜만에 연락 왔길래 이건 줄 알았는데..”

강희는 물끄러미 만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고시원을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강희는 손바닥만 한 창문을 발견하고 열어보았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맞은편 건물의 붉은색 벽돌뿐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다. 강희는 숨이 턱 막혀 바로 문을 닫았다. 창문에는 강희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얼굴이 비쳤고, 그 뒤로 만수가 느릿느릿 바지를 올리고 있었다. 강희는 창문에 비친 만수를 보며 물었다.
“월세 빌려준 돈으로 겨우 여기서 사는 거야?”
그 소리에 만수는 올리던 바지를 멈추었다.
“어? 응... 월세가 비싸더라고 알바도 하면서 공부하려니까 돈도 아껴야 되고”
만수는 강희의 눈치를 보며 바지를 다시 슬금슬금 발목까지 내렸다. 그순간 강희는 마치 꾹 누른 스프링이 튕겨져 나가듯 고시원 방을 빠져나왔다. 만수는 바지가 발목에 걸린 상태로 갑자기 나가버리는 강희에게 부딪쳐 의자에 머리를 박고 넘어졌다. 소리를 죽인 신음 소리를 연신 내뱉었고 복도에 지나가는 사람이 무안하게 쳐다보았다. 강희는 문을 나설 때 멈칫하여 고개를 돌려 생각하더니 만수의 신발을 챙겨 나왔다.
강희는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한참을 걸었다. 한강 다리를 건너던 중 걸음을 멈추었는데 발을 쳐다보니 닳아 해진 스니커즈 신발의 앞창이 들려 발가락이 강희에게 수줍게 인사했다. 이내 강희는 구겨 신은 신발을 발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손가락에 걸고 걷던 만수의 신발을 쳐다보더니 한쪽 발만 만수의 신발을 신었다. 손가락 냄새를 맡는데 매캐한 냄새가 나서 인상을 찌푸렸다. 강희는 짝짝이 신발로 밤의 달빛을 받으며 한강 다리를 건넜다. 강희는 걸으면서 자주 아래를 보며 자신과 만수의 교차하는 신발을 쳐다보았다. 계속 쳐다보니 마냥 어색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

그날 저녁 지친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강남의 펜트하우스였다. 강희는 그 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높은지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성민을 만나기로 했는데,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강희는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짝짝이 신발이 더욱 부끄러워져 신발 안 발가락을 오므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강희 앞에 성민이 도착했다. 성민은 캐주얼한 양복 차림으로 강희를 반갑게 반겼다.
“강희야! 여기!”
그는 늦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여유 있는 태도로 걸어오며 말했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강희는 이해해서 그런 건지 분위기에 짓눌려 숙여진 건지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강희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강희의 짝짝이 신발을 보고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강희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희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 살짝 뒷걸음질 치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리고 강희의 다친 팔을 보고 호들갑스럽지 않게 물었다.
“다쳤어...? 괜찮아?”
성민은 처음으로 강희의 팔에 대해서 물었고, 강희도 그제야 자신의 팔이 다쳤다는 것을 상기했다. 성민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머금은 강희에게 따스하게 물었다.
“올라갈래? 밤 되니까 추운데 올라가서 얘기하자”
잠깐 망설이던 강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비에 젖은 길고양이가 낯선 사람에게 처음으로 다가가듯 성민의 뒤를 쫓았다. 엘리베이터 안은 너무 고요해서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조심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23층에 도착했다. 성민의 집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넉넉한 공간에 집안 전체가 까마귀처럼 검은빛을 띄었다. 통유리로 된 창문은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 자동차 그리고 건물들의 불빛이 TV 광고를 대신하고 있었다. 강희는 창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희는 따뜻한 기운과 함께 더욱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성민은 주방에서 간단한 간식거리와 와인을 꺼내며 강희를 불렀다.
“강희야! 여기 와서 이거 좀 먹어 기다리느라 배고팠겠다.”
강희는 성민이 꺼낸 음식은 전부 낯설었다. 강희는 그제야 자신이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테이블에 앉은 강희는 그 음식들을 기대가 서린 경계하면서 조금씩 먹어보았다. 잠자는 고양이를 쓰다듬듯이 사근사근 맛을 보았다. 입안의 음식이 부드러워질수록 긴장도 풀리기 시작했다. 와인 한 모금 한 모금은 강희의 몸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성민은 몽롱하게 취한 강희를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보냈어... 네가 내준 학원비... 그거 때문에 보자고 한 거지?”
순간 강희는 얼음 땡을 하듯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때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그런데 모르는 척한 거야 아는 척하면 다음에 네가 학원비 안 내줄까 봐”
성민은 그 얘기를 하면서 개구지게 웃었다. 갑작스러운 성민의 고백에 크게 부풀어 오른 풍선이 터지듯 강희도 웃음보가 터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차가웠던 분위기는 충분히 녹아들었다.
“엄청 열심히 일했구나 벌써 자기 집도 갖고 회사 대표들은 다 이런데 사나?”
“그냥 뭐...”
“오빠 로비로 들어올 때 회사 대표 같더라 뉴스에 나오는 그런 사람 같아”
“너랑 헤어지고 공부 밖에 안 했어 그러다 창업 지원받아서 만든 회사가 잘 돼서...”
성훈은 말끝을 흐렸다. 그 대답의 여백은 아득한 넓이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젊은 나이에 이 정도의 집에 자기 능력으로 살려면 그 노력의 질과 양을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되려 고통스러워하는 듯해 보였다. 강희는 살짝 일그러진 그의 미간 주름을 이어보았다.
“우리 처음에 게이클럽에서 만났잖아 그런데 오빠는 게이도 아니면서 왜 거기 있었던 거야?”
이번에는 강희가 술래가 되어 성민을 얼음으로 만들었다. 곧이어 이어진 성민의 답은 얼음을 깨듯 튀어나왔다.
“매일 돌림노래가 들려”
의아한 대답에 강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민은 잠시 쉼을 가진 뒤 말을 이어갔다.
“똑같은 노래가... 그런데 남자들이 나한테 성적으로 관심 가질 때는 그 소리가 안 들리는 거야”
성민은 홀린 듯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강희는 낯설지 않았다.
“맞아 나도 그게 재밌더라”
강희는 공감한다는 듯 나직이 읊조렸다. 성민은 살짝 놀라 강희를 보았다. 강희는 창가 쪽으로 다가가 어딘가로 바삐 달려가는 차들과 밤이 넘도록 꺼지지 않는 건물의 불빛을 보며 다시 읊조렸다.
“도돌이표가 끝없이 반복되는 거지... 지겨워”
순간 성민의 집은 진공이 가득 메워지는 것 같았다. 강희는 그 감각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휙 뒤돌아 성민을 보며 적막을 깨웠다.
“우리 섹스할래?”
강희의 제안은 이 넓은 공간의 고요를 가득 채웠다. 성민의 눈은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강희와 눈을 맞대었을 때 강희의 눈은 농담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성민은 그제야 이 모든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좋아”
성민은 동의의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 이내 우물쭈물하면서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눈길을 둘 곳을 이리저리 찾다 결심한 듯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나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해도 될까?”
성민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강희는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은 준비를 하겠다며 방에 들어간 뒤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기다림이 지루해질 때쯤 강희는 방문에 다가가 귀를 대어 보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성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됐어! 들어와!”
강희는 살짝 놀라 몸을 뒤로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진정하고 방문을 슬며시 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몽고반점 가득한 성민의 푸르스름한 엉덩이였다. 그리고 엉덩이 골만 간신히 가리고 있는 아찔한 야광 T팬티가 보였다. 검은색 바탕의 방 덕분에 야광이 더욱 밝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T 팬티 라인은 멜빵처럼 어깨를 건너 앞부분까지 이어져 있었다. 맨키니를 입은 성민은 침대에 양팔과 다리를 침대 모서리에 밧줄로 묶은 채 엎드려있었다. 그리고 침대 한편에는 회초리가 놓여 있었다. 성민은고개를 돌려 회초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희야! 이 회초리로 내 엉덩이 때려줘! 혼내줘! 때찌 때찌!”
성민의 목소리는 사포로 긁어낸 듯 갈라졌다.
“어서 때려줘! 욕하고! 침 뱉고! 발로 차고! 할퀴고!”
성민의 엉덩이는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강희가 충격에 놀라 멍해져 있었다. 방 안의 정적은 성민을 실망과 부끄러움에 빠지게 만들었다.
“미안해 오늘은 왠지 하고 싶은 걸 해볼 수 있을 거 같아서...”
강희는 한동안 반응이 없다가 그동안 밀린 웃음을 쏟아내듯 한참을 웃었다. 성민은 갑자기 크게 웃는 강희를 보며 어리둥절했다. 강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방안이 가득 차게 웃었다. 그렇게 속에 눌려져 있던 웃음을 다 털어낸 강희는 성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성민의 엉덩이를 보는데, 몽고반점이 아니라 멍이 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일하다 생긴 흔적들이었다. 강희는 연민 어린 시선으로 엉덩이를 훑었다. 그리고 회초리를 집었다.
“이걸로 때려주면 돼?”
성민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해주는 거야...? 이상하지 않아...?”
강희는 회초리를 이리저리 훑으며 슬며시 말했다.
“이상하지 그런데 재밌네”
“응? 뭐라고?”
“별말 안 했어 이제 때린다!”
“응!”

강희는 회초리 높게 들어 성민의 엉덩이를 향해 내려치려는 순간 방 문 앞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야! 최성민!”
격앙된 소리에 놀란 두 사람은 방문을 바라보는데 강희는 순간 민영이 서 있는 줄 착각했다. 그 여자의 낯설지 않은 표정과 입을 틀어막은 손의 반지는 강희가 어떤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여자는 강희의 손에든 회초리를 뺏어 성민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내려쳤다. 쉬지 않고 마구 내려치는데 맑고 청아한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성민은 묶여 있는 상태라 벗어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사정없이 맞고 있었다. 강희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해 집 밖을 뛰쳐나왔다. 얄궂은 장난을 치고 어른에게 혼날까 봐 황급히 도망치는 어린아이 같았다. 한강은 도시의 불빛들이 환하게 비추었고, 강희는 그 위를 힘차게 달렸다. 강희의 얼굴에는 웃음이 탁탁 터지고 있었다.

***

늦은 아침 강희는 따스한 햇빛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일어났다. 오래간만에 잠이 끊기지 않고 잘 수 있었다. 강희는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사람들의 분주한 출근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른한 분위기를 깬 것은 문을 두드리는 집주인 아주머니의 노크 소리였다. 강희는 문을 열고 아주머니를 맞이했다. 약속한 기일이 되어 찾아온 아주머니 앞에서 강희는 덤덤히 돈을 송금했다. 문 앞에 서 있는 강희 뒤편에 철우와 만수의 물건들이 보였고, 송금한 돈은 전부 성민이 보낸 준 돈이었다. 핸드폰으로 이체를 확인한 아주머니는 환한 미소로 말했다.
“백십팔만 원! 전부 들어왔네 진작에 이러지 그랬어!” 강희 의뭉스러운 표정을 숨긴 채 서 있었다. 뒤이어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다음 달에도 부탁해!”
주인집 아주머니는 그 말을 남기고 옥탑방을 내려갔고, 강희는 문 앞에 훼뎅그렁하게 남겨졌다. 그리고 강희는 어디선가 시티팝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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