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당신은 ‘죽음’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이 낯설고 피하고 싶은 일로 받아들여질 테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피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묵직하게 남는다. 특히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이 떠나는 순간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렇듯 죽음은 우리 곁에 가까이 존재하지만, 막상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이러한 감정들 사이로 죽음을 회피하지 말고, 삶의 일부로 바라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상조업체 ‘꽃별천지’의 대표 김범진(32) 장례지도사다. 그는 임종 직후 시신 이송부터 장례 절차 조율, 발인 등 장례식의 전 과정을 책임진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을 유족과 함께 꾸려 간다. 고인을 ‘가족’처럼 인식하고, 이들의 마음을 보듬으며 그들의 마음이 쓸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책임진다. 남겨진 이들이 다시 삶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 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죽음을 끝이 아닌 ‘삶의 일부’로 바라보기를 희망한다. 그가 말하는 죽음은 남은 이들이 떠난 이의 생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방식이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의미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지점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그의 시선을 알아보기 위해 부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지민 기자
스물다섯, 죽음을 되돌아보다
그가 처음부터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생소한 직업에 가까웠다. 건축 분야에 관심이 있던 그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공사 현장에서 일하며 먹고 사는 일에만 집중했다.
“장례지도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몰랐어요. 시신 닦는 일을 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죠. 당시에는 젊은 장례지도사도 많이 없어서 더욱 알기 어려웠어요. 대신 지루함을 싫어하는 제 적성에 잘 맞는 공사 현장에서 일을 했죠.”
그러던 중 우연히 장례지도사로 일하던 친구에게 같이 일해 보지 않겠냐고 권유받았다.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기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친구의 부탁이기에 선뜻 수락했다. 그는 친구를 만난 다음 날 친구가 일하는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직접 마주한 장례지도사로서의 업무는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동네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장례지도사로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받았어요. 저는 겁도 많고 미신도 많이 믿어서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친구가 내일 일하는 장례식장에만 가 보자고 제안해서 장례식장에 가서 장례지도사가 하는 일을 지켜봤어요. 안치실에서 친구가 시신의 턱을 열었을 때 피랑 복수가 나오는 광경을 보고 도망 나오기도 했죠.”
그러나 유족이 고인을 모시는 입관식을 봤을 때 김 대표의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보고 도망쳐 나왔던 시신에 유족들은 입을 맞추거나 얼굴을 맞댔다. 고인도 살아생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저는 시신이 무섭고 거북해서 도망 나왔는데 누군가에게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고인을 껴안고 입 맞추는 모습을 보며 죄송스럽고 민망했죠. 장례지도사의 업무 처리 과정을 처음 보면서 고인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많이 바뀌었어요.”
꽃별천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이후 김 대표는 장례지도사의 일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본인의 손으로 모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상조업체에 취직해 3개월 동안 수습 기간을 거치며 장례지도사로서의 업무를 배워 나갔다. 장례지도사 교육원에서 350시간의 교육 시간을 수료함과 동시에 장례 업무 실습도 병행했다.
“처음에 이 일을 접하고 나서도 장례지도사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배워만 두고 나중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일만 배워 두고자 했죠. 장례지도사를 하려면 자격증이 필요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육원에서 수업을 듣고, 야간에 장례식장에 따라다니면서 장례식의 전반적인 업무를 배웠어요.”
처음 장례지도사를 시작했을 때 많은 어려움이 그를 둘러쌌다. 장례지도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풍토와 열악한 근무 여건 탓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나이의 장례지도사를 하대하거나 불신하는 시선도 그에게는 일상이었다.
“처음 장례지도사를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셨고, 친구들은 놀렸어요. 그래서 마음이 좋지 않았죠. 일을 할 때는 어린 게 무슨 장례를 진행할 수 있겠냐고 따지는 분도 계셨어요. 언제 장례식장으로 출동할지 모르기 때문에 식사 시간이나 수면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신체 리듬이 많이 깨졌죠. 그 여파로 한때 우울증을 앓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김 대표는 장례지도사 업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유족들에게 끝까지 도움을 주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장례 일을 하다 보면 가정에 있는 그의 가족을 떠올리게 돼, 고인의 가족이 나의 가족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잘 모시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장례식을 마친 후에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고, 추후 다른 가족 구성원이 사망했을 때 김 대표에게 연락해 장례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장례지도사로서 일을 하면서 많은 가족분들을 만났어요. 일을 하다가 어머니가 떠오르면 유족이 제 가족처럼 느껴져서 최대한 성심껏 모시게 되더라고요. 그중에는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거나 저에게 장례 진행을 한 번 더 요청하는 분도 계시죠. 그분들은 저에 대한 좋은 기억과 믿음을 바탕으로 연락을 주시는데, 제가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아 계속하는 것 같아요.”
그는 장례식 현장에서 느낀 책임감에서 나아가 직접 ‘꽃별천지’라는 상조업체를 설립했다. 꽃별천지라는 이름은 그가 어릴 적 하던 놀이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꽃나라, 별나라, 천국, 지옥 등 죽으면 갈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정하자는 의미다. 그는 꽃별천지를 통해 장례 비용 부담을 줄이고 진심으로 고인을 존중하는 장례를 선사하고자 한다. 그동안 같이 장례지도사 일을 하면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일을 하고 있다.
“장례지도사가 돈을 많이 번다는 이야기가 많아요.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돈만 보고는 절대 오래하지 못하는 직업이거든요. 이전에 일하던 곳에서 장례 비용을 값비싸게 책정했을 때 지불을 부담스러워하시는 분들이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장례를 진정성 있게 대하는 사람들만 모아 꽃별천지를 설립했죠. 광고, 홍보 비용 등을 제외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장례를 진행하고 있어요.”
죽음을 새롭게 해석하다
꽃별천지 운영과 더불어 김 대표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활동한다. 주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장례 현장의 이야기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전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장례가 지나치게 정형화된 방식에 머물러 있기에 폭넓은 방식의 장례 문화가 생기길 바란다. 죽음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청년이 삶의 마지막을 한 번쯤 떠올리게 하고, 장례 문화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금의 장례는 너무 단일화된 방식 같아요. 장례식장은 엄숙해야 하고, 영정 사진은 무표정이어야 하는 것처럼요. 저는 향후 제 장례식장이 저의 전시관이었으면 해요. 고인이 살아온 사진이나 자랑하고 싶었던 것 등을 보여주는 거죠. 현재와 같이 어렵게 느껴지는 장례식의 분위기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장례업을 지속하면서 남은 이들이 고인의 삶을 풍부하게 기억할 수 있는 장례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그는 죽음을 삶과 완전히 분리된 영역으로 두기보다는 언젠가 모두가 경험하게 될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죽음은 단순히 끝이 아닌 떠난 이를 기억하고 그 사람과의 과거를 추억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떠난 사람을 마음 한켠에 애틋한 추억으로 간직하게 하고, 남은 이들이 고인을 다시 떠올리며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청년들이 죽음을 마주할 때 순간의 감정과 기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기억이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 주는 시기가 오니까 그걸 억누르지 말고 받아들이면 돼요. 떠난 사람을 다시 떠올리는 과정이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을 다루고 정리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거든요. 각자 자신의 속도로 기억을 정리하고 애틋함을 곱씹어 나가다 보면, 죽음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질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