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
이정유
신문사에서 화제의 신인 작가 J의 소설에 관한 칼럼을 작성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J는 대학 시절 나와 같은 문학 창작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이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지는 대략 5년 정도 되었다. 물론, 내가 알던 J는 소설에 재능이 있었고, 예전부터 충분히 등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가 소설집을 출간한 것을 알게 된 순간, 내가 가져왔던 그의 재능에 관한 생각은 현실로 드러난 셈이었다. J의 등장은 문학계를 놀라게 했다. J는 감각적 문장으로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의 허망함을 다루었는데, 어느 평론가는 그의 작품이 근래에 나온 청춘 소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며 높이 평가했다. 독자들의 반응 또한 열광적이었다. J가 소설집을 발표했다는 소식은 나에게도 큰 충격이었고 한동안 멍한 정신을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
나는 소설가가 되지 못했다. 대학 졸업 후 2년간은 소설 쓰기에 전념했지만,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역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자, 나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에 서른을 앞두고 소설 쓰는 것을 미뤄야 했다. 운이 좋아서 한 신문사 문화부에 입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많은 기사를 작성했다. 신문사도 그런 내게 신뢰를 보내며, 특히 내 전문 분야인 책 관련 칼럼을 종종 맡기곤 했다. 그렇게 J의 소설에 대한 칼럼도 내가 작성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신문사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도저히 J의 소설 칼럼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신문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의 경력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작은 신문사였기에 나 말고는 그 칼럼을 쓸 사람이 마땅히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J의 소설 칼럼을 쓰기로 했다.
신문사의 칼럼 작성 지시를 받고 내가 한 일은 우선 J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서 정보란에서 J에 대한 이력과 그가 쓴 소설에 관한 정보가 나왔다. 소설집의 제목은 <단절>이었다. 최근에 찍힌 듯한 J의 사진도 찾아볼 수 있었다. 사진은 아마 겨울에 촬영되었던 모양이었다. J는 목도리를 매고 있었으니까. 사진 속 배경은 미술관 같았지만, 카메라의 초점이 흐릿해서 정확하게는 알아볼 수 없었다. 전과 달리 안경을 쓰고,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지만 단번에 그가 J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변함없이 매서웠기 때문이었다.
*
그해에는 많은 신입회원이 들어와서 환영회는 유례없이 북적였다.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신입회원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사람은 J였다. J는 나보다 두 살 연상이었고, 많은 양의 독서를 했으며 등단을 목표로 글을 쓰고 있었다. 여러모로 통하는 점이 많았던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와 J는 문학 동아리의 정규 활동인 합평은 물론, 공강 시간에도 동아리방에서 자주 함께했다. J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의 실력과 다양한 면모에 더욱 빠져들었다. 어느 날 J는 내게 같이 소설을 준비해서 신춘문예에 도전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합숙하며 소설을 쓰고 서로 고칠 점을 얘기해주기로 했다. 당시 나는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 본 경험이 없었기에 그의 제의가 무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한 달 동안 동아리방에서 합숙하며 각자의 소설을 완성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당선되지 못했다. 수상하지는 못하더라도 신춘문예에 응모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한 단계 더 성장시켜 줄 것이라 믿었다. 전국의 수많은 작가 지망생과 경쟁했던 것도 하나의 경험이라고 여기며 실망을 참았다. 그러나 J는 꽤 낙담한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동아리방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가끔 보더라도 표정이 확연히 어두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춘문예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J가 교내 문학상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춘문예에 떨어진 바로 그 소설로 교내 문학상에 응모하여 수상했다. 나는 온갖 정신이 신춘문예에 팔려있었기에 교내 문학상에 큰 신경을 쓰지는 못했다. 분명 교내 문학상에도 응모할 생각이 있었으나 나는 출품하지 못하였다. 교내 문학상이 조기 마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J는 교내 문학상 대회가 조기 마감되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구태여 J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묻지 않았다. 다른 회원 모두가 J의 교내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고 있을 때, 나 혼자 딴지를 거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J가 동아리 회원들에게 축하받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만 볼 뿐이었다.
J가 교내 문학상을 받으면서, 나와 J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이 흐르게 되었다. J를 따르는 회원이 서서히 많아졌다. 심지어 동아리에서 매년 진행하는 문집 제작 등의 중요한 동아리 운영 계획에 관해서도 회장인 내가 아니라 J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J는 자신이 회장이라도 된 것처럼 당당하게 대답하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J의 필력과 문학적 소양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원래부터 그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여태껏 모른 척했던 것일까. 그렇게 1년 가까이 J와 동아리 활동을 했다. 겉으론 내색하진 않았지만, 내 신경은 오직 그를 향해 있었다.
J에 대한 내 감정이 극에 달한 건, 그가 나의 여자 친구 선미를 빼앗아 간 이후였다. 선미 역시 문학 동아리 회원이었고, 1년 가까이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에게 그 1년은 굉장히 값진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선미는 변했다. 그토록 웃음이 많던 그녀의 얼굴에선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엔 권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변심했다고 느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았다. 선미가 왜 나를 떠났는지 이유를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선미는 여전히 동아리 활동을 했다. 선미를 마주쳐도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리의 이별은 동아리 회원들 사이에서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나는 동아리 회장이었기 때문에 회원들은 우리의 이별에 대해 더욱 수군거렸다. 나는 동아리를 그만두고 싶었으나 회장 지위 때문에 쉽게 그만두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내게 소문 하나를 들었다며, J와 선미가 몰래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선미가 만난다는 사람이 같은 동아리의, 내가 그렇게도 의식하던 남자였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불안해졌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나는 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선미의 행적을 쫓았다. 선미는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15분 정도를 기다리자, 선미를 향해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J였다. 둘은 다정히 포옹하고 입을 맞추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는 곧 슬픔으로 바뀌었고, 힘주었던 주먹이 풀리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걸어갔다.
그들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은 듯했다. 몇 개월 후, J는 선미를 떠났고, 선미는 울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한 술자리에서 그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선미가 캠퍼스 한복판에서 J를 향해 왜 자신의 전화나 문자를 받지 않느냐며 소리치고 울면서 그를 쫓아갔다는 것이었다. J는 그런 선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선미에 관한 이야기는 한동안 들려왔고, 이후에도 그녀가 J에게 지속적인 연락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선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J가 이토록 선미를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다. 선미는 J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선미는 학교를 그만뒀다. 그 이후로 나는 선미를 볼 수 없었다.
*
다른 기사들까지 작성할 일이 많아서 J의 소설 칼럼을 작성하는 것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칼럼 작성뿐만 아니라 J의 소설을 읽기조차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편집장은 마감일이 다가온다며 나를 재촉했다. 나는 매일 낮마다 전화로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때마다 나는 대충 말을 둘러댔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나는 서점에 갔고, J가 쓴 소설을 찾아 구매했다. 구태여 찾을 필요도 없었다. 서점 입구, 신간 소설 매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소설집 <단절>을 집어봤다. 표지의 디자인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했다. 흰색 표지에 검은 동그라미 두 개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 동그라미는 사람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마치 이 책을 집은 나를 노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집에서 나는 그의 소설을 천천히 읽어봤다. J의 소설집은 6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설집에 수록된 그의 소설은 수준 이상이었다. 소설들은 중첩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뛰어난 작품이 몇 편 수록되어 있었고 모난 작품은 없었다. 동아리 내에서도 독보적인 실력이었고 당시에도 등단을 노리고 있던 그였지만 이렇게 성공적으로 작품을 출간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의 성공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 동창들도 J의 등단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J의 등단 소식을 모르는 이들에겐 구태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 듣는 건 괴로운 일이다. 특히나 그 대상이 J라면 더욱더.
J는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그의 소설을 읽은 뒤 그의 소식이 더욱 궁금해졌다.
오랜만에 동아리를 함께 활동하며 친했던 회원 몇 명이 모여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그때 특히나 친했던 동아리 회원이 내가 참여하면 좋겠다며 따로 연락을 해왔었다. 실은 J의 근황에 대한 궁금증으로 머리가 가득했던지라 막판에 참여를 결심했다. 술자리에 가면 그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알아낼 기회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J 말이야. 요즘 성공한 것 같더라고.
-맞아. 생각할수록 대단해.
-내 말이. 그는 문예창작학과는커녕 인문대생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J에 관한 이야기가 예상대로 주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가 J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J와는 오랜 세월 소식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들이 J에 열광한 건 정말로 그와 친해서라기보단 자신들이 활동한 동아리에서 소설가가 배출된 일종의 자부심 때문일 것이었다.
J에 대한 소재거리가 떨어졌고 그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만을 나눌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덧 화제는 J가 아닌 다른 회원들로 넘어갔다. 한 친구는 술에 취한 채 당시 활동하던 여자 회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회장까지 지낸 나로서는 이런 얘기가 듣기 거북해서 한쪽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그때 김여정의 이름도 오랜만에 들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을 무언가가 스쳤다. 바로 여정이 썼던 글이었다. 여정이 동아리 활동 당시 쓴 단편 습작 소설과 J의 소설집에 실린 단편이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정은 내향적이고 말수가 적었다. 그녀는 문학에 전방위적으로 관심이 많았지만, 동아리 활동 때는 합평 같은 정규 활동에만 참여했고, 다른 친목 활동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회원들이 있었어도,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나는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여정에 관해 물어봤다. 하지만 다들 술에 취했는지, 내 말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그들은 여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정은 그저 조용한 여자애였으니까.
여정의 소설은 출판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소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우리 동아리 회원들밖에 없을 것이다. 그마저도 기억하는 동아리 회원들은 드물 것이 분명했다. 5년 전에 남이 쓴 습작 소설을 기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집에 돌아온 나는 예전 노트북을 꺼내서 동아리 활동 당시에 합평했던 파일을 찾아보았다. 나는 당시 합평했던 동아리 회원들의 소설을 모두 파일로 보관해 두었다. 예전 노트북은 느렸으나 다행히 잘 작동했다. 그리고 여정의 소설과 J의 소설을 비교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J의 소설 중 하나인 <차가운 추억>이라는 작품이었다. 같은 반 두 친구가 동반자살을 한다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두 소설은 거의 똑같았다. 소설에서 잠깐 등장하는 선생님의 성별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차가운 추억> 외에 다른 소설들도 서로 유사한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마치 J의 소설집은 여정의 습작 소설을 이리저리 재조립해서 엮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J의 소설과 여정의 습작 소설을 비교했다. 정말로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J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허무에 가까웠다. 여태껏 그를 경쟁자로 생각했던 내가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선 여정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예전 동아리 회원 명부에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이고 전화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나는 여정의 습작 소설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인쇄기에서 기계음과 함께 붉은 빛이 나며 종이가 한 장씩 출력되기 시작했다. 인쇄가 완료되자 여정의 습작 소설을 정리하여 서류 가방에 넣었다. J의 소설집 <단절>도 함께 챙겼다. 다음날은 J의 출판 기념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
최근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J였기에 출판 기념회 행사장은 강당 좌석이 꽉 찰 정도로 청중이 많았다. 자리가 꽉 차 있었기에 나는 뒤에 서 있었다. 카메라 몇 대가 J와 진행자의 대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나는 맨 뒷줄에 서서 진행자와 J의 대담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J는 진행자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며, 향후 계획으로 장편 소설을 출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말을 들은 청중은 환호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J의 표절 사실을 청중들에게 밝히고 싶었다. 마침내 그들의 대화가 끝났고, 그들은 청중과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했다. 청중은 박수를 보냈다.
대담이 끝나고 청중들과 인사를 갖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줄을 서서 J를 보기 위해 기다렸다. J는 내 앞에 있던 청중들에게 악수를 해주고 있었다. 청중들과 인사를 하던 J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여긴 어쩐 일이야?
J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전에 우리가 한 약속 잊었나요? 먼저 등단한 사람이 있다면 축하해 주기로 한 거.
내 뒤에 청중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는 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내가 올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J는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 노력하듯 청중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청중이 가져온 그의 책에도 사인을 해주었다. 그의 인기가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처럼 말이다.
J는 마지막에 떠나는 관계자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모두 자리를 비우고 J와 나 둘만이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
-어쩐 일이야? 말도 없이?
-기자가 됐어요. 사실 선배 소설에 대한 칼럼을 쓰기로 되어 있어요.
-인터뷰는 하지 않을 거야.
-물론 그 일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J는 나를 빨리 떼어내 버리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짐을 정리했다. 마치 어디론가 빨리 떠나는 사람처럼 말이다.
짐 정리를 마친 J가 강당을 떠나려고 할 때,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J는 뒤돌아서 나를 쳐다봤다.
-선배가 김여정의 작품을 표절한 것을 알고 있어요.
-무슨 소리야?
나는 가방에서 J의 소설집과 여정이 쓴 단편소설을 꺼내 들었다.
-모든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부인해도 소용없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차가운 추억>은 여정이 6년 전 쓴 습작 소설을 그대로 베꼈습니다. <어둠의 아이>는 여정이 7년 전과 6년 전에 쓴 두 소설의 줄거리를 이어 붙였고요.
나는 <단절>에 수록된 다른 소설 역시 문체나 주제 의식 등에서 여정의 습작 소설들과 흡사하다고 덧붙였다. 나는 인쇄된 여정의 습작 소설들을 J의 앞에 있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직접 확인해 보셔야겠습니까?
나는 J를 향해 압박을 가했다. 처음에는 J가 자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J는 나를 가볍게 무시하고 강당을 나가려고 했다.
-대답할 가치도 없어. 모두 헛소리야.
J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꾸 도망치려는 모습에 비로소 나는 J가 여정의 소설을 표절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J는 이미 강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했고 나는 J를 붙잡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만요. 그러면 그때 왜 내게서 선미를 뺏어갔습니까? 선배는 그녀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그녀를 망가뜨리기까지 했어요.
-그 이유를 정말로 몰라?
J는 강당의 문 앞에서 멈추며 말했다. 나는 J의 뻔뻔함에 당황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설마 잊어버렸어? 그때 네가 폭로했었잖아. 공모전 말이야.
우리 학교에선 매년 소설 공모전을 진행했다. J 역시 그 상을 탄 적이 있었다. 그때 나와 신춘문예를 준비하다가 낙방한 그 원고로 말이다. 문제는 J의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다음 해의 공모전에도 출품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입상을 한 사람은 참여를 제한한다는 대회의 규칙 때문에 J는 출품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J는 한 번 더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문학 동아리의 다른 회원의 이름으로 출품하고자 했다. 그때 그 회원이 여정이었다.
나 역시 소설 공모전의 수상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J가 다른 회원의 이름으로 수상을 하게 된다면 나로선 엄청난 망신이자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내 작품을 공모전에 출품했다. 결과는 J의 수상이었다. 여정의 이름으로 말이다. 나의 작품은 심사평에 짧게 언급된 것이 전부였다. 동아리 회원들은 J를 우러러보았다. 두 번의 상을 탄 것은 학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다른 회원의 이름을 빌려서 수상을 했으니 더욱 여유 있어 보였다. 회원들은 J가 동아리 수준의 실력을 넘어서 등단해도 실력이 모자라지 않을 것이라고들 얘기했다. 나는 그렇게 동아리 내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J가 본인의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했다면 차라리 덜 힘들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보하기로 했다. 공모전의 수상 작품은 대필 작품이라고 말이다.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다. 나의 제보 이후 J는 잠적했다. 그러나 이것은 J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름을 빌려준 회원, 여정 역시 문제였다. 학과에 이 사실이 퍼졌고, 교내 공모전의 심사위원을 맡았던 교수님들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교 측은 여정에게 중징계를 내렸다. 그 뒤로 여정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당시 J의 소설이 여정의 이름으로 공개되었을 때, 나는 J와 여정의 관계를 의심했었다. 여정은 그 시기에 J와 붙어 다녔다. 게다가 J가 자신이 쓴 소설을 대리 투고하기를 요구했더라면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요구했을 테니까. 그러나 여정이 학교를 그만둔 후, 나는 자연스레 그녀를 잊었다. 졸업 준비로 정신이 없던 데다, 내 폭로로 여정이 자퇴에 이르렀다는 죄책감에 그 기억을 외면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후 J는 자취를 감춘 여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녀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저 은둔하며 의욕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J는 일 년 후에 복학했다. 그리고 다시 학교생활을 했고 동아리에도 돌아왔다. 동아리 회원들의 시선이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활동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J는 내 전 여자 친구 선미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처음엔 재밌는 장난이었지만, 점점 더 진지한 복수가 되었다.
-그래서 선미에게 접근한 겁니까?
-나는 너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고 싶었어.
-선미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모든 죄는 우리 둘이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여정에게는 잘못이 있었을까? 여정이는 모든 걸 잃었어. 나는 네 여자 친구를 망가뜨리는 걸 즐겼지. 그리고 서서히 부숴 버렸어.
나는 순간 멍해졌다. J는 선미와 교제하면서 정서적인 학대를 일삼았다. 나에게 복수하려는 철저히 고의적인 의도였다. 선미는 서서히 망가졌음에도 J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J는 선미를 버렸던 것이었다.
심연 속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J가 그때 선미를 빼앗아 가고 망가뜨린 건 결국 그때 공모전에서 내 폭로 때문이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이제 내가 J의 표절에 관해 물어볼 차례다.
-당신은 김여정의 작품을 표절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으로 대리 투고한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표절까지 저질렀어요. 대중은 표절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공개되지도 않은 습작 소설이야.
-습작 소설이라고 해도 그녀의 작품이에요.
-사람들이 네 말을 믿어줄까?
-만일 이걸 기사로 써서 전국의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말인가요?
-지금 와서 네가 문제 삼아 봤자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을 거야.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그래, 네가 표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해. 그러나 나는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방금 J가 한 말이 그가 간접적으로나마 표절을 인정한 것으로 들렸다. J가 일종의 자백을 했음에도 머리가 복잡해졌다.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여정의 작품을 간접적으로나마 내 작품에 녹여내고 싶었어. 그녀의 소설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문제의 공모전 당시 여정은 자신의 이름으로 J의 작품을 출품하는 것에 부담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J의 제의를 거절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친구라는 이유에서였다.
-여정에게 죽을 정도로 미안했다. 그녀에게 보답하고 싶었어. 그녀의 작품이 세상에 읽혀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번엔 반대로 여정의 작품이 J의 이름으로 공개된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차가운 추억>은 명백한 표절이라고 칩시다. 그럼 다른 작품들은 무엇입니까? 다른 작품들은 표절 같으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진실을 말해주십시오.
-모든 작품이 그녀의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졌어. 다만 그 작품들은 나에게만 보여준 것이었지.
이제야 실타래가 풀리는 것 같았다. 여정은 나머지 습작 소설 원고를 동아리에 공개하지 않고 J에게 개인적으로 보여줬기에 <차가운 추억>을 제외하곤 표절을 확신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로써 J는 6편의 소설 모두 표절한 것임이 밝혀졌다.
J는 여정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의 작품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의 글을 각색해 자신이 발표했다. 그렇다고 J가 이런 황당한 이유의 표절을 저질렀다는 것을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이제 너에게 해줄 얘기는 끝났어. 진실을 알게 된 기분이 어때?
-솔직히 말하면 놀라웠습니다. 처음엔 선배가 여정의 작품을 표절한 이유가 그저 단순한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저 창작 불안 같은 것 때문인 줄 알았어요.
-기자라고 했지? 이번에도 폭로해 봐.
J는 그 말을 마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끝까지 당당했다. 아니면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그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홀로 빈 강당 안에 남겨졌다.
*.
그날 이후, 나는 J에 관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기사를 신문사에 제출하자 편집장은 깜짝 놀랐고, 내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 기사가 신문사에 예상치 못한 역풍을 가져올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신문사 내부에도 미묘한 기류가 감지되었다. 나와 J가 같은 학교 출신이며,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새어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때문에 내가 J에 대한 열등감으로 무리하게 기사를 작성했다는 소문도 돌기 시작했다.
결국, 신문사에선 오랜 논의 끝에 기사를 발행하지 않겠다고 했다. 최근 명예훼손 문제로 사회가 예민한 상황에서 작은 신문사로서는 이런 논란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나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지만, 이 일을 그대로 덮어두고 끝낼 수는 없었다. 진실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다른 방법으로라도 반드시 밝혀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그렇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J의 이야기를 반드시 풀어내야 했다. 글을 쓰는 동안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들이 어지럽게 맴돌았으며, 혼란스럽고 미친 듯했던 시절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마침내, 나는 장편 소설 <폭로>를 완성했다. 이 작품에서 나는 J의 표절 사건을 중심으로 사건의 전말을 차근차근 풀어내고자 노력했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은 바꾸어 두었다.
나는 여러 차례 <폭로>를 투고한 끝에 마침내 한 출판사에서 출간을 결정했다. 출판사는 내 소설이 J의 표절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엔 출간을 주저했지만, 작품이 화제를 끌어모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는지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섰다. 그들 역시 주목받을 작품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폭로>는 서점에 진열되자마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독자들은 소설 속 표절 작가의 정체를 추측했고, 눈치 빠른 이들은 그 인물이 J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런 의혹이 퍼지자, J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소설이 과장된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내가 소설의 화제성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J를 겨냥했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소설은 입소문을 타며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나는 한순간에 화제의 작가이자, 논란 속 고발자가 되었다.
나는 문득 J도 <폭로>를 읽었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 J가 내 소설을 읽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그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