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피 한 방울이 약이 되기까지, 생명의 공정을 거치다 (한성대신문, 612호)

    • 입력 2025-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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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5-06-09 00:00

[사진 : 연합뉴스]



<편집자주>

우리의 피로 만든 의약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많은 헌혈자가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팔을 걷고 혈액을 나누지만, 그 피가 의약품으로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헌혈로 모인 혈액은 수혈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생명 유지를 위한 의약품으로 제조되기도 한다. 이러한 의약품이 바로 ‘혈장분획제제’다.

혈장분획제제는 쉽게 말해 헌혈자의 혈액을 원료로 제조된 의약품이다. 헌혈을 통해 수집된 혈액에서 단백질 성분 추출 및 바이러스 제거 등 여러 공정을 거치면 마침내 혈장분획제제가 생성된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혈장분획제제는 환자들에게 안전하고 효과적인 치료 수단이 된다.

앞으로도 혈장분획제제의 수요는 고령화, 감염병 증가 등의 이유로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헌혈로부터 얻어진 혈액이 어떻게 혈장분획제제로 탈바꿈하는지, 그 구체적인 제조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박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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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 속 단백질을 변형 없이 보존해 필요한 성분만을 골라낸 것이 바로 혈장분획제제다. 이는 ▲혈액응고인자 제제 ▲면역글로불린 제제 ▲알부민 제제로 구분돼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 일반적인 의약품은 여러 물질을 합성하는 공정을 거치는 반면, 혈장분획제제는 혈액에서 순수한 단백질 성분을 뽑아내기만 하면 된다. 육희정(강원대학교 강원대학교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혈장분획제제는 대량의 혈장으로부터 특정 단백질을 추출해 농축시킨 의약품”이라고 말했다.

혈장분획제제의 핵심이 되는 단백질 성분은 혈액 속 ‘혈장’에 포함돼 있다. 혈액은 액체 성분인 혈장과 세포 성분인 혈구로 구성돼 있다. 혈장은 전체 혈액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수분과 함께 호르몬, 단백질 등의 성분이 녹아 있다. 반면 혈구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으로 구성돼 체내에서 다양한 생리 기능을 수행한다. 강재원(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혈장분획센터) 부장은 “혈장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분, 비타민, 호르몬, 효소, 단백질 성분 등을 포함하고 있다”고 전했다.

단백질, 의약품으로 재탄생하다

혈장분획제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헌혈을 통해 수집된 혈액에서 혈장을 분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것이 바로 ‘원심분리기’다. 원심분리기는 고속 회전으로 발생하는 원심력을 이용해 혈액 속 성분들을 밀도에 따라 분리하는 장치다. 이를 통해 혈장과 혈구가 빠르게 구분된다.

원심분리기를 거친 혈액의 밀도 차이에 따라 성분 추출이 가능해진다. 혈장은 전체 성분의 90% 이상이 수분으로 이뤄져 상대적으로 낮은 밀도를 갖는다. 반면 혈구는 적혈구 등의 세포 구조를 지녀 밀도가 높다. 이에 혈장은 위로 떠오르고, 혈구는 아래로 가라앉는다. 육 교수는 “혈구의 세포 구조 내에는 여러 성분이 포함돼 순수한 물보다 높은 밀도를 갖는다”며 “원심력을 활용하면 혈구와 혈장이 분리된다”고 덧붙였다.

분리된 혈장은 혈장 내 존재할 수 있는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 ‘용매-세제 처리’를 거치게 된다. 용매-세제 처리는 외피를 가진 바이러스를 화학적으로 비활성화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용매는 특정 물질을 용해시키는 재료다. 또한 세제는 지방 성분을 제거하는 ‘계면활성제’로,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비누와 유사한 성질을 가진 물질이다.

우선, 혈장 용액에 세제를 투입하면 외피 보유 바이러스의 외피인 지질막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세제는 물과 잘 섞이는 친수성 부분과 기름과 잘 붙는 친유성 부분을 동시에 갖고 있다. 친수성 부분은 혈장의 수분과, 친유성 부분은 외피 보유 바이러스의 지질막과 결합된다. 이후 용매가 작용해 지질에 결합한 친유성 부분을 제거하면, 바이러스는 외피를 완전히 상실하고 감염력을 잃는다.

용매-세제 처리 후에는 ‘냉에탄올 분획법’이 사용된다. 냉에탄올 분획법은 혈장에 낮은 온도의 에탄올을 넣으면서 온도, pH 등을 바꿔가며 단백질을 순서대로 침전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혈장에서 특정 단백질 성분을 추출하고 앞선 용매-세제 처리에서 완벽히 제거되지 않은 비외피 바이러스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냉에탄올 분획법을 활용하면 단백질마다 고유한 ‘등전점’ 차이를 이용해 혈액응고인자, 면역글로불린, 알부민 등의 단백질을 분리할 수 있다. 등전점이란 특정 분자가 전기적인 전하를 띠지 않고 중성인 pH를 의미한다. 이 상태에서는 단백질 간 정전기적 반발력이 사라져 서로 응집하기 쉬워진다. 이때 용해도가 가장 낮아지면서 단백질이 잘 침전되는 것이다. 여기서 용해도란 특정 물질이 용매에 얼마나 잘 녹는지를 나타내는 정도다. 예를 들어 설탕은 물에 잘 녹기 때문에 용해도가 높고, 모래는 물에 잘 녹지 않아 용해도가 낮다. 육 교수는 “에탄올 농도와 온도 변화는 단백질과 용매 사이의 상호 작용을 약화시켜 단백질의 침전을 촉진시킨다”고 전했다.

먼저 약 8%의 에탄올 농도와 –3℃의 조건에서는 피브리노겐이 분리된다. 에탄올 농도가 8%일 때, 피브리노겐의 용해도가 급격히 감소해 다른 단백질보다 먼저 침전되도록 한다. 또한 저온에서 단백질의 변성을 최소화해 기능을 보존할 수 있고 침전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육 교수는 “피브리노겐은 다른 단백질보다 용해도가 더 크게 감소하고, 분자량이 크기 때문에 먼저 침전된다”고 밝혔다.

혈장 용액으로부터 분리된 피브리노겐은 혈액응고인자 제제 생산에 쓰인다. 피브리노겐을 포함한 혈액응고인자는 출혈 시 혈액 내에서 연쇄적으로 활성화돼 혈전*을 형성하고 출혈을 막는 역할을 한다. 평소에는 비활성 상태로 혈액 내에서 순환하다가 출혈 등의 응급상황 발생 시 해당 성분이 활성화돼 혈액응고를 촉진한다. 강 부장은 “혈액응고인자 제제는 지혈, 출혈 예방, 수술 전후 혈액응고 관리에 사용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혈장 용액에 에탄올을 추가로 투입해 농도를 25%가량으로 높인 후 온도를 약 –5℃로 낮추면 감마글로불린이 침전된다. 피브리노겐이 침전될 때의 조건보다 에탄올 농도가 상승해야 감마글로불린의 용해도가 감소해 효과적인 침전을 유도할 수 있다.

침전된 감마글로불린은 면역글로불린 제제에 활용된다. 감마글로불린과 같은 면역글로불린은 체내에 미생물이 침입하면 항원**과 결합해 면역 기능을 수행하는 단백질이다. 이때 면역글로불린의 ‘Fab(Fragment antigen binding) 영역’이 활성화된다. Fab 영역은 가변적인 구조를 갖는 항체의 항원 인식 부위로, 항원과의 결합을 가능케 한다. 면역글로불린이 투입되면 Fab 영역이 활성화돼 면역 반응이 촉진되는 원리다. 강 부장은 “면역글로불린 제제는 류마티스 관절염과 같은 자가면역 질환, 혈소판 감소증 등에 쓰인다”고 설명했다.

감마글로불린까지 침전되면 혈장 용액에는 알부민만이 남게 된다. 알부민은 수용성 단백질로, 타 단백질에 비해 잘 침전되지 않는 특징을 띤다. 육 교수는 “구조적 안정성이 뛰어난 알부민은 저온 및 고에탄올 환경에서도 침전되지 않고 용액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혈액 내 단백질 성분의 50~70%를 차지하는 알부민은 최종적으로 알부민 제제에 사용된다. 알부민은 혈관 속에서 체액이 머물게 해 혈관과 조직 사이의 삼투압을 원활하게 한다. 삼투압은 액체의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하려는 성질을 말한다. 이로 인해 혈관 내에 농도가 높은 알부민은 주변 조직의 수분을 혈관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처럼 알부민은 혈관 내 수분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붙잡아 체내 혈액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혈관 내 적절한 수분이 유지돼야 혈액이 원활하게 순환할 수 있기 때문에 알부민은 안정적인 혈액 순환에 필수적인 요소다. 강 부장은 “출혈성 쇼크, 수술 및 외상 치료 등에 알부민 제제가 활용된다”고 전했다.

안전성과 범용성, 두 마리 토끼를 잡다

혈액 내 단백질 성분을 활용하는 혈장분획제제는 높은 생체적합성을 갖는다는 장점이 있다. 합성 의약품으로는 대체가 어려운 혈액 내 단백질을 직접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 부장은 “혈장분획제제는 혈액 내 특정 단백질을 유효 성분으로 사용하며, 해당 유효 성분은 생체 내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단백질과 유사해 특정 질환 치료에 대한 효과가 합성 의약품보다 우수하다”고 설명했다.

혈액형에 관계없이 사용 가능하다는 점도 혈장분획제제의 이점으로 꼽힌다. 이는 응급상황 발생 시, 혈액형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도 신속하게 투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육 교수는 “혈장분획제제는 혈액형과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혈장분획제제가 의료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만큼 관련 산업도 확대될 전망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프레지던스 리서치(Precedence Research)에 따르면, 세계 혈장분획제제 시장은 2025년 약 314억 달러(한화 약 43조 원)에서 2037년 약 619억 달러(한화 약 85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강 부장은 “혈장분획제제는 재생의학, 희귀질환, 만성질환, 항체치료 등 다양한 의료 현장에서 사용도가 빠르게 늘고 있다”며 “국내외 수요 증가와 높은 시장 성장률로 혈장분획제제는 혁신 치료의 중심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에 혈장분획제제의 안정적인 수급을 위한 정책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헌혈률에 큰 영향을 받는 혈장분획제제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역시 「혈액제제 규제 동향 정보집」을 통해 혈장분획제제의 품질관리 시 주의사항, 제제별 제조 방법 및 시험기준, 저장 방법 등에 대한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강 부장은 “혈장분획제제 정책 개선은 원료 수급 불안정, 공급난, 채산성 등 여러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육 교수는 “혈장분획제제는 헌혈 의존도가 높고 바이러스 제거, 품질 관리, 보관 등이 까다로워 지속적인 가이드라인 개정이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혈전 : 혈관 속에서 피가 굳어진 덩어리

**항원 :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세균, 바이러스 등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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