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일상다례(日常茶禮)’. 일상에서 차를 마시며 삶의 깊이를 더한다는 의미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시간의 톱니 속에서 청년은 잠시 멈춰 자신만의 호흡을 되찾는다. 끝없는 경쟁에서 벗어나 차 한 잔을 우리고 작은 여유와 회복을 찾는 차 문화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잠시 차 향내음을 맡고 온기를 느끼는 시간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쉼표가 된다.
맞춤형 차부터 티코스, 그리고 말차 격불까지. 오늘날의 다양한 차 문화는 과거보다 다층적인 경험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청년은 차의 향과 온도를 오감으로 느끼고, 다도(茶道)를 체험하며 차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접한다. 동시에 격식과 형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차를 향유한다.
이렇게 청년에게 차는 단순한 전통 음료를 넘어 일상의 틈새에 천천히 스며들며 매 순간을 부드럽게 적신다. 잔에 담긴 작은 세계 속에서 발견되는 여유와 사유, 그리고 그로 인해 다시 빚어지는 우리의 하루를 함께 들여다보자.
김혜윤 기자
임지민 기자
“차를 마시는 것은 세속의 소란을 잊기 위함이다.”
- 린위탕
최근 청년층 사이에서 차를 다양한 형태로 즐기는 차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차 산업의 동향 및 시사점」에 따르면 국내 차 시장 규모는 2018년 약 1조 20억 원에서 2022년 약 1조 2,870억 원으로 4년 만에 약 28% 넘게 성장했다. 실제로 차 관련 행사나 가게에서 젊은 세대의 참여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신정호(국제차문화과학대학원) 주임교수는 “청년층은 차를 단순 음료가 아닌 경험으로 즐기며 차 시장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차 문화는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작은 여유와 회복을 찾으려는 ‘웰니스(wellness)’ 문화에서 비롯됐다. 웰니스는 ‘웰빙(Well-being)’·‘행복(Happiness)’·‘건강(Fitness)’의 합성어로, 신체·정신·사회적 건강을 균형 있게 실천하며 일상의 만족도를 높이는 삶의 방식이다. 성과 중심 사회에 지친 청년은 차를 통해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마련하며 웰니스를 추구한다. 박동춘(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은 “치열한 삶 속에서 웰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차 문화는 일상 속 회복과 자기 돌봄의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웰니스를 지향하는 흐름 속에서 차는 슬로우 라이프의 대표 주자로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대피소 같은 존재다. SNS와 숏폼 등의 콘텐츠가 시선을 쉴 틈 없이 자극하는 삶 속에서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카페에서 짧게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 차의 향과 온도, 우려지는 시간을 함께 음미하는 방식의 천천한 휴식이 주목받는 이유다. 이승우(아도 티하우스) 대표는 “차는 느림의 미학”이라며 “직접 찻잎, 다기, 찻잔 등을 하나하나 선택하는 모든 순간은 인생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고 설명했다.
차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며 관련 행사에도 MZ세대가 잇따라 몰리며 ‘티(Tea)켓팅’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티켓팅은 차를 의미하는 티(Tea)와 매표를 뜻하는 티켓팅(Ticketing)이 합쳐진 단어로, 차 관련 행사 등의 티켓을 예약하기 위한 경쟁을 의미한다. 실제로 경복궁에서 진행하는 궁중 약차와 다과를 즐길 수 있는 ‘경복궁 생과방’ 행사 온라인 신청에는 매년 수만 명 이상이 몰릴 정도다.
차방전, 마음을 치료하다
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청년층은 다양한 방식으로 차를 즐기고 있다. 그중 개인에게 맞춤형 차를 추천해 주는 ‘차 큐레이션 카페’가 주목받는다. 체크리스트에 마음 상태와 취향을 적으면 그에 맞는 찻잎을 약봉지에 담아 처방해 준다. 심리 테스트와 같은 방법이다. 차 큐레이션 카페는 개인의 감정과 상황을 진단해 그에 맞는 한 잔을 제안한다. 한 사람을 위한 맞춤형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차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성찰의 매개가 된다. 마음 상태를 기록하고 그에 맞는 차를 처방받는 경험은 취향을 발견하는 탐색의 시간이 된다. 단순히 맛을 고르는 행위가 아닌 지금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살피는 과정인 것이다. 박 소장은 “천천히 차를 우리고 음미하는 일련의 과정은 자기 성찰의 매개로 작용한다”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가 직접 ‘차방전’을 처방하고 있는 차 큐레이션 카페에 방문했다. 자리에 앉자 4가지 항목으로 된 체크리스트를 받았다. 힘든 마음을 이겨내고 싶다고 체크하자, 지금의 힘든 과정은 결국 더 좋은 결과로 더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는 설명과 함께 홍차가 나온다. 차를 우려내고 향과 온기를 음미하며 한 모금 마시는 동안 고단했던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진다. 차를 마시는 동안 차의 설명이 머릿속에 남아 방향을 잃은 마음을 붙들어 주는 느낌이다. 지금의 고초가 어쩌면 과정일 수 있다는 작은 확신이 생기며 위로를 받는다. 차방전을 체험한 진효진(30)씨는 “차방전은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감정을 돌아보는 지점을 제공한다”며 “이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차 한 입, 교양 한 모금
맞춤형 차를 접하며 생긴 흥미를 바탕으로 색다른 경험을 추구하는 청년층 사이에서 ‘티코스’가 스몰 럭셔리로 인기를 끌고 있다. 티코스는 코스 요리처럼 차와 다과를 순서대로 제공하며 각각의 차에 담긴 역사와 매력에 관한 이야기를 곁들여 음미할 수 있도록 구성된 점이 특징이다. 단순한 다과 세트가 아니라 하나의 서사를 따라가는 미식 경험에 가깝다는 점에서 청년층의 호응을 얻고 있다.
차의 역사부터 다도 방법까지 하나하나 배우며, 평소 접하기 힘든 차의 섬세한 향을 알고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다. 이러한 학습형 체험은 차의 배경과 제조 과정, 다도 예법까지 직접 접하게 함으로써 기존에 어렵게 느껴졌던 차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다. 티코스를 운영하는 정겨운(삼월황) 대표는 “티코스는 차의 배경과 다도 과정을 직접 배우는 경험을 제공해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차 문화를 보다 친근하게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차의 세계를 파헤쳐보기 위해 티코스를 선보이는 찻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티코스에서는 차의 향과 맛에 맞춰 다과를 곁들였으며, 각각의 조합이 어울리는 이유를 들려줬다. 이어 6대 차류를 소개하며, 하나의 차나무에서 재배되더라도 온도와 제조 방식에 따라 향과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이를 통해 차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고 다채로운 향과 맛을 비교할 수 있었다. 나아가 차를 마신 뒤 어떤 향이 느껴졌는지, 향이 왜 그렇게 받아들여졌는지 현장에 있는 이들과 사견을 나누는 짧은 시간을 가진다. 티코스를 함께 체험한 위성민(35)씨는 “차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과 찻잎의 유래를 들을 수 있을 뿐더러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나눌 수 있는 점이 좋았다”고 전했다.
말차 거품이 만드는 순간의 몰입
차의 세계를 넓게 경험한 청년들이 이를 일상적인 취향으로 확장하면서 말차 열풍도 함께 확산되고 있다. 다양한 공간에서 말차를 격불*하거나 쏟아진 말차를 찍어 올리는 ‘말차 스필(Spill) 챌린지’ 유행이 대표적이다. 단순 음료 소비를 넘어 시각적인 즐거움과 일상 속 참여형 체험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청년층에게 말차는 예쁜 색감과 커피의 건강한 대체제로 웰빙 트렌드에 적중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높아진 인기에 힘입어 말차는 카페 메뉴로 확산되며 일상에서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음료로 자리매김했다. 신 주임 교수는 “선명한 녹색과 부드러운 거품은 시각적인 만족을 주고, 카페인 부담이 적어 건강과 에너지 관리에도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청년들은 직접 말차를 격불하는 ‘촉각적 경험’을 통해 순간에 집중하고 불필요한 걱정을 차단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말차 가루를 물과 섞는 과정에서 차의 질감과 저어지는 소리, 거품의 형태까지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자신만의 박자와 호흡을 조절하며 명상과 같은 몰입 효과를 낳는 것이다. 격불을 통해 완성된 말차를 바라보고 맛보는 순간 성취감과 함께 경험하는 안정감은 격불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다. 박 소장은 “격불 과정은 차에 집중하도록 유도함과 동시에 순간적인 몰입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말차를 애음하는 기자로서 격불,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저어 말차 거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팔이 저려 왔지만 거품을 내고 우유를 부어 말차 라테를 완성했다. 직접 만들어 보니 말차의 색과 향, 질감을 온전히 느끼며 순식간에 몰입했다. 격불은 일상의 잡생각을 잠시 내려놓는 경험을 선사했다. 위 씨는 “다도는 본래 수행의 행위”라며 “거품을 내기 위해 바른 자세로 순간 집중해 격불하는 과정에서 잡생각이 사라진다”고 전했다.
차 문화는 전통의 격식에만 머물지 않고, 청년의 개인적인 감각과 취향을 반영한 폭넓은 문화로 확장될 전망이다. 청년이 차를 일상 속에서 여유와 몰입, 개인적인 성찰의 매개로 경험하며 다양한 시도가 활발해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신 주임 교수는 “청년층의 생활 방식과 결합한 다양한 체험과 시도가 주목된다”며 “앞으로 차 문화의 확산과 발전을 이끌 핵심 요인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격불 : 말차를 휘젓는 도구인 다선을 이용해 찻가루에 물을 부어 거품을 내는 행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