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자의 외교 노트>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세계가 저물다 (한성대신문,621호)

    • 입력 2026-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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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6-04-13 00:00

팍스 아메리카나(Pax-Americana) 종말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평화를 뜻하는 라틴어 ‘팍스(Pax)’에서 비롯된 말로, 미국의 강력한 힘으로 유지되는 세계 평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며, 각국은 자국 이익 중심의 움직임을 넓히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 아래 미국은 약 60년 전부터 세계 곳곳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국제 질서를 유지해 왔다. 크게 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이하 NATO)’를 중심으로 군사 긴장을 관리했고, 중동에는 직접적인 개입과 압박을 통해 충돌 확산을 억제했다. 동시에 아프리카, 남태평양 등 작은 국가와 도시까지도 미국의 힘이 미치고 있다. 이들의 현지 정치 결정과 경제 흐름도 미국의 외교나 금융 정책에 따라 크게 움직인다. 강선주(국립외교원 국제통상경제안보연구부) 교수는 “작은 국가에서도 미국의 정책과 결정이 현지의 정치·경제적 선택을 제한하거나 조정하는 힘을 갖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한 외교 기조가 팍스 아메리카나에 균열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최근 미국은 NATO 탈퇴 가능성을 시사하거나 동맹국에 방위비 증액을 요구했다. 기존에는 상호 안보 책임을 강조하며 협의 중심으로 유지되던 미국의 외교 관행을 뒤집은 셈이다. 이로 인해 동맹국은 방위 의무와 협력 범위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불안을 느끼게 됐다. 이정남(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 공습 사태 대응 과정에서 전쟁 종료를 암시했다가 다시 강경 대응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여러 국가의 탈달러 움직임이 한층 더 눈에 띄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등 반서방 성격을 띠는 브릭스(BRICS) 국가는 달러 의존도를 낮추고 위안화 사용을 늘리고 있다. 실제로 IMF 집계에 따르면 전 세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에서 차지하는 달러화 비중은 2015년 약 66%를 기록했던 반면, 올해 2분기에는 약 56%로 낮아졌다. 이정남 교수는 “달러 중심 질서를 대체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지만 탈달러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군사적 요구에 대한 동맹국들의 대응에서도 분열이 드러나고 있다. 기존에는 미국이 군사 지원 등을 요구하면 동맹국들이 이에 호응했다. 그러나 중동 사태 이후 동맹국들의 대응이 엇갈리면서 기존 미국 중심 동맹 체계에 분열이 일고 있다. 미국이 군사 지원을 요구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과 한국 등 주요 동맹국들은 직접적인 군사 참여에는 선을 긋거나 후방 지원에 그치는 태도를 유지했다. 동맹이라 한들 각국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흐름이 뚜렷해진 것이다. 신성호(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는 “안보나 외교 현안에서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노선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동맹국뿐 아니라 미국 시민들의 주도하에 미국 역대 최대 규모로 ‘노 킹스(No Kings)’ 시위도 벌어지고 있다. 불확실한 외교·안보 정책이 국내 정치 분열로 번진 결과다. 시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왕에 비유하며 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요구를 내세우고 있다. 지난 28일에는 미국 전역 3,300여 곳에서 동시에 진행됐으며 최소 8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신 교수는 “노 킹스 시위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비폭력 시위”라고 말했다.

미국의 책임 회피와 이익 독식에 동맹국의 신뢰에는 금이 갔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호르무즈 해협 통항 시 통행료 부과 가능성을 언급하며 ‘승자’로서 이익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는 분쟁 관리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로 해석된다. 강 교수는 “미국의 책임 회피는 그간 미국이 주도해 온 질서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균열은 세계 경제와 안보 전반에 연쇄적인 불확실성을 낳고 있다. 중동 긴장 고조로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동반 상승하며 각국의 물가와 무역 부담이 커지고 있고, 국제 공급망 역시 충격을 받는 모습이다. 동시에 군사 충돌 가능성이 확대되면서 각국은 방위비를 늘리고 에너지 확보 경쟁에 나서는 등의 대응을 하고 있다. 신 교수는 “이란은 국제 유가를 자극해 세계 경제에 부담을 주는 방식으로 서방의 군사 행동을 제약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신뢰 약화 속에서 한국도 직접 대응에 나서고 있다. 실제로 지난 9일 미국과 이란이 2주간 휴전에 합의했지만, 호르무즈 해협 통항 조건이 불투명하고 변수도 많다. 이 때문에 한국을 포함한 선박들의 안전한 통항 여부가 여전히 불확실한 실정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자국 선박의 안전과 에너지 수송 차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직접 협의를 병행하고 있다. 이정남 교수는 “한국은 사안별로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보다 능동적인 대응을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임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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