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성(性)> 우리 선조와 동행한 ‘성’, 그 흔적을 찾아서 (한성대신문, 549호)

    • 입력 2019-10-14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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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1-29 17:30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 중 하나인 ‘성’. 우리는 그림, 음악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성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이처럼 인간이 성을 표현하려는 움직임은 과거부터 계속돼 왔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몸짓, 예술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성을 형용하려 했다. 그 중에는 성을 맘껏 표출하는 시대도 있었고, 반대로 성적 표현이 금기시된 때도 있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과 표현 방식은 다소 다를 수 있지만, 우리 조상들의 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선조들은 ‘성’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권력과 풍요의 상징

우리 민족이 본격적으로 ‘성’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문자가 없어 그림이나 암각화 등을 통해 고대인들의 성관념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울산 울주군 소재의 ‘반구대암각화(국보 제285호)’가 좋은 예시다. 이 암각화에는 한 남성이 성기를 드러낸 채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와 관련해 정성희(실학박물관 학예팀) 학예연구사는 “선사시대의 민속자료를 통해 당시의 성관념을 추측해볼 수 있다”면서 “이때는 다산이 곧 경제력이며 국력과도 연결됐기 때문에 성적인 표현을 여과없이 드러냈다”고 설명했다. 즉, 의도적으로 성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다산을 기원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서도 고대인들의 성적 표현은 서슴없었다. 고려시대 일연이 집필한 『삼국 유사』의 내용을 조금만 살펴봐도 신라인들의 솔직한 성적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지철로왕조’에는 신라 지증왕의 남근이 1척 5촌(약 45cm)이나 돼 마땅한 왕후를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성기 크기를 구체적인 수치로 표현한 점은 당시 지증왕의 왕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 학예사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삼국시대에는 이같은 성적 표현이 권력을 상징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표현은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시대에도 이어졌다. 고려시대 충렬왕 때 지어진 가요 <쌍화점>의 가사 중 “回回(회회)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중략)… 그 짓(술집) 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중략)… 긔자리예집) 나도 자라 가리라”라는 구절을 해석하자면 서양 무역인을 의미하는 회회아비와 술집아 비가 여성의 손목을 잡는 등 애정표현을 시도하고, 여성이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인 태도로 이에 응하는 것이다. 이는 성관계에 우호적인 고려 시대의 성풍속이 가요에 투영됐다고 볼 수 있다.

유교사회 속에서도 피어난 ‘성’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가 막을 내리고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전까지 자유로웠던 성적 표현에 제동이 걸렸다. 유교의 영향 때문이다. 물론 조선 초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은 후 성에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유학자들인 사림파가 집권했고, 그들은 조선이 명실상부 ‘유교’ 국가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더군다나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 지배층인 양반들의 성에 대한 통념은 더욱 보수적이고 엄격했다.

정 학예사는 당시 사회에 대해 “조선의 도덕윤리는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는 등 성적 표현이 제한됐던 시대였다”며 “이때에는 성을 쾌락이라 생각하지 않고 대를 잇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따라서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는)남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욕구를 계속 억누르다보면 언젠가 풍선처럼 터지기 마련이다. 조선 중·후기를 지나면서부터는 어떤 방식으로든 성을 형용하려는 움직임이 대두됐고, 급기야 판소리, 풍속화 등을 통해 ‘성’을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서민들은 <춘향가>, <변강쇠가>와 같은 노래를 불렀고 수많은 명화를 남긴 화가 김홍도, 신윤복은 풍속화의 한 갈래인 춘화를 그렸다.

이에 정 학예사는 “조선 중·후기에 서민문화가 발달하면서, 일부 상류층부터 하류층까지 모두가 판소리나 그림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면서 “성적 표현도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다양한 장르로 표현됐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조선 후기에는 성도 인간의 삶 중 하나라는 인식이 생겼다”고 전했다.

▲김홍도가 그린 춘화 (자료 제공 : 한국성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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