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한성문학상 - 소설 부문 가작> 나의 개츠비

    • 입력 2019-12-02 00:00
    • |
    • 수정 2019-12-03 16:31



박소진(예술 1)

곱게 낡은 종이의 향이 책방을 가득 채운다. 외관은 아주 낡은 동네 책방이지만 개화기 시절에 볼 법한 골동품들로 인테리어 된 책방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풍겼다. 그런 느낌들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인해 동네 책방은 단골이 꽤 많은 편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핸드폰보다는 종이나 펜을 들고 끄적거리고 있었고 사색에 잠겨 있곤 했다. 주로 등단하지 못하는 문인들이나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즐겨 찾곤 했다.

소율은 안경을 올려 쓰며 펜을 들고는 그녀 앞으로 온 편지를 몇 번이고 읽었다.

‘밀란 쿤데라. 사인은 심장 마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외 다수의 책 집필. 그를 아름답게 편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율은 영상 디자이너였다. 정확히 말하면 죽은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만 편집해 그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사후 영상을 만드는 것이다. 묘지에 가면 죽은 사람의 무덤과 함께 빔 프로젝터 형식으로 그 사람의 일생이 담긴 영상이 펼쳐지곤 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살다가 죽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은 묘지에 꽃을 놓고 조의를 표하곤 했다. 영상을 아름답게 잘 만드는 소율의 능력이 입소문을 타 소율은 사후 영상 편집 계에서 나름 입지를 다져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율은 자신의 앞으로 밀란 쿤데라의 영상 편집 부탁이 올 줄은 전혀 몰랐다. 이거 잘못하다가 나 같은 일개 영상 디자이너가 그분의 마지막을 망치는 게 아닐까. 소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했다. 일단 쿤데라의 무의식 속에 잠재한 생각이나 스타일을 알아가기 위해 소율은 그가 생전에 쓴 책들이나 자서전 같은 것들을 책방을 뒤져 찾기 시작했다. 쿤데라의 ‘불멸’을 꺼내려는 순간 부러질 것 같은 창백한 손이

불쑥 농담을 꺼내 소율에게 건넸다.

“밀란 쿤데라를 편집하다니, 성공했네.”

어느새 소율의 옆에 온 K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보라색 립스틱을 바른 K는 베레모를 쓰고 삐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이 위대한 작가를 감히 편집해도 되나 싶기도 해.”

“말은 그렇게 하고 잘 하잖아.”

이렇게 자료 조사도 열심히 하고 있고. K는 소율의 옆에 쌓인 쿤데라의 책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 사람을 간접적으로 알지. 중얼거리며 소율은 자료조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K는 책꽂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 들고 자연스럽게 소율의 옆에 앉아 책을 읽었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책방을 조용히 울린다. 소율은 쿤데라의 죽음 영상 디자인 계획을 세우면서 중간 중간 오는 메일을 점검한다.

‘안녕하세요, 소율 씨. 며칠 전 제 남편이 죽었는데 사진과 사연을 보낼 테니 그를 영상으로 무덤 위에 영원히 아름답게 제작해 주세요. 사례는 부르시는 만큼 하겠습니다.’

근 7년간 죽음과 관련된 일만 하니, 소율은 예전과 달리 자신이 감정적으로 메마르고 삭막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이런 메일을 받아도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모두 안타깝다는 마음이 드는 대신 돈을 얼마 정도 요구할까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영상 편집 계획을 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더욱 그랬다. 밥 먹고 살기 위해 전공을 살려 이 일을 할 때, 소율은 가끔씩 사후 영상 편집 일이 소름 끼치고 우울하다고 느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영상으로 아름답게 살려내는 건 나름 보람이 있으나 문득 영상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고인의 모습을 보면 아, 이 사람이 죽었구나 하고 뒤늦게 자각하곤 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인지, 이제는 제법 이런 일에 익숙해진 그녀였다.

소율은 메일함을 닫고 쿤데라의 영상 편집안의 초안을 짜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K는 간간이 콧노래를 불렀다. 아마 개츠비가 나오는 부분을 읽고 있을 것이다. K는 개츠비가 나올 때면 자신만의 리듬 있는 콧노래를 부르곤 했으니까.

“한 열 번쯤 읽은 것 같은데, 안 지겨워?”

소율이 심드렁하게 묻자 K는 고개를 저었다.

“질릴 때쯤 새로운 감정들이 느껴져서 괜찮아.”

허세로 들릴 법한 말도 진지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K의 표정에 소율은 웃었다. 앵무새와 록 밴드를 좋아하는 K는 등단하지 못하는 작가다. 자신만의 강한 개성이 뚝뚝 떨어지는 K의 글은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렸다. 내용이 어렵고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특유의 몽환적이고 기괴한 분위기가 좋다고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K가 등단을 하지 못한 이유도 심사위원들의 감성과 그녀의 글이 가지고 있는 감성이 맞지 않아서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문학은 취향의 문제이니 말이다. 열심히 영상 편집 계획을 짜던 소율은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디 가.”

“상담 받으러.”

소율은 짐을 챙기고는 밖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그런 소율의 뒷모습을 보며 동네 책방 주인은 작게 중얼거린다.

“저 여자 오늘은 혼자 얌전히 말만 하네. 예전에는 목이 졸린다고 지랄하더니.”

“소율 씨. 어서 오세요.”

상담실 문을 열자 한이수 상담의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한이수는 홍차 티백을 꺼내 머그잔에 우려내 소율에게 갖다 주었다.

“밖에 춥죠?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서 감기 많이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평범한 안부 인사도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말하는 한이수의 말에 소율은 미소를 지으며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어떠셨나요?”

한이수는 소율을 마주 보며 K에 대해 물었다. 소율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좀 달랐어요. 악을 쓰고 제 목을 조르거나 저에게 왜 자신을 막지 않았냐며 비난하곤 했는데 오늘은 얌전히 책만 읽더라고요.”

보라색 립스틱과 베레모는 여전하지만요. 소율의 말에 한이수는 옅게 웃었다.

“이제 작별 인사하실 때가 온 것 같네요.”

더 이상 상담하러 오지 않으셔도 돼요. 소율 씨,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한이수의 말에 소율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근 2년간 자신을 괴롭혀온 환각이 없어지고,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생각했던 것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아쉬움과 후련함이 섞인 미묘한 기분이다. 한이수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소율은 밖으로 나갔다.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2년 전, 처음 K를 만난 날에도 온 지상을 삼키려는 기세로 비가 사납게 왔었다.

“다음 달까지 제 영상 좀 만들어 주세요.”

2년 전, 기껏해야 2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보이는 K라는 여자는 책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소율에게 다짜고짜 다가와 부탁을 했다. 돈이 담긴 봉투와 자신이 쓴 글과 수십 장은 되어 보이는 사진들을 내놓는 행동에 소율은 K를 올려다보았다. 염색을 많이 해 푸석푸석해 보이는 금발 머리에 보라색 립스틱을 진하게 바르고 체크 베레모를 쓴 K는 너덜너덜한 청바지에 록 밴드가 입고 다닐 법한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많아봤자 20대 초반인 이 아이가 왜 자신의 사후 영상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거지? 아리송한 소율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K는 담담하게 말했다.

“꼭 잘 만들어 주세요.”

별말 없이 담백하게 말하는 K의 목소리와 표정은 무언가 묘했다. 허세도 아니고, 환멸도 아니고 삶의 모든 애착과 후회를 놓아버린 표정이 이런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K의 얼굴은 초연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없지만 자신의 사후 영상을 잘 만들어 달라는 K의 말은 소율의 비약적인 상상력을 증폭시켜 ‘꼭 잘 만들어 주세요’ 라는말이 소율의 귀에는 마치 죽겠다는 소리로 들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 이런 사람을 마주할 때 솔직히 소율은 어떻게 할 지를 모르겠다. 자살하지 말라고 한바탕 설교를 하면서 삶에 대한 아름다움과 네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알길래 그렇게 쉽게 말하냐고 할 수도 있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사람에게 더욱더 고통을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타인의 일이니 그냥 내버려 두기엔 안 된다는 동정과 연민이 소율의 마음 한쪽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 내가 혼자 너무 갔나. 왜 자살이라고 단정 짓지. 그냥 관상용으로 두려고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혼자 머릿속에서 써낸 망상을 지워 나가며 소율은 K를 힐끔 보았다. 사후 영상 편집을 하면서 자살한 사람들의 사연도 종종 보아왔고, 그럴 때마다 그렇구나. 안됐네 하면서 넘기던 소율이었지만 K는 유난히 눈이 가는 사람이었다.

K는 별말 하지 않고 소율의 근처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힐끔 제목을 보니 위대한 개츠비였다. 소율은 K가 준 일기와 사진을 보기 시작했다. 사진은 주로 K 자기 자신의 모습이 찍힌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외국으로 보이는 시내 한복판에서 꽃다발을 들고 서 있거나 물담배를 피고 있는 등 감각적으로 찍힌 사진들이 참 예뻐 보였다.

“그건 베를린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어느새 소율의 옆으로 와 꽃다발을 들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며 K는 건조하게 덧붙였다.

“사진 정말 잘 찍었네요. 친구가 찍어준 거예요?”

“아뇨. 제가 삼각대 설치하고 찍었어요.”

사진 쪽으로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소율의 말에 K는 킬킬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작가예요.”

뜻밖의 대답에 소율은 K를 보았다. 멋지다는 무언의 감탄이 섞인 소율의 눈빛에 K는 손사래를 쳤다.

“그리 거창한 거 아니에요. 그냥 문예지에 소설 투고하면서 푼돈 받는 글쟁이예요.”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거기에 살을 붙여 가며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는 게 어렵고 힘든 일이잖아요. 멋지세요.”

소율의 말에 K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다. 직업란에 작가라고 쓰고 백수라고 읽죠. 키득거리며 K는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소율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K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 K의 뒷모습을 보며 소율은 생각했다. 중2병 같은 감성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소율의 관점에서 봤을 때 K는 꽤나 매력적인 사람 같았다.

집으로 온 소율은 K가 준 사진과 글을 죽 훑어보았다. K가 쓴 글들은 대부분 일기나 혼잣말에 가까운 수필이었다.

‘그것을 다시 찾았어요. 무엇이라고 물었나요. 영원이요. 그건 태양과 함께 가버린 바다예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영혼. 내가 노래했던 사람들의 영혼. 나를 붙들어 주길.’

‘눈이 많은 해의 무거운 눈송이들 아래, 활기 없는 무관심에서 생겨난 권태가 불멸의 차원을 띠곤 하지.’

천천히 곱씹어 읽어 보면 오글거림이 담겨있지만, 이 문장들을 처음 읽었을 때 소율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얼핏 봐도 K는 말을 부릴 줄 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왜 등단을 못 할까. 충분히 하고도 남을 사람인 것 같은데. 소율은 K의 다른 글들을 모조리 읽기 시작했다. 편지도 있었는데, 발신인은 없고, 그저 혼자 끄적거린 것 같았다.

‘여긴 피렌체야. 오후에 비가 올 테니까 나갈 때 우산 챙기고…….’

‘오늘은 베르사유에 다녀왔어…….’

‘지금 그리말디스에서 피자를 먹는 중이야…….’

K의 글과 사진을 보았을 때, 남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뚜렷한 자의식과 주관을 가진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이 사람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싶고, 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 대해 이렇게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소율은 자신의 앞으로 거액의 액수와 함께 온 영상 편집 부탁을 집어치우고 K의 영상 편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 영상 편집은 잘 돼가고 있어요?”

책방에서 K의 영상 편집 초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앵무새가 그려진 보라색 맨투맨을 입은 K가 옆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럼요.”

소율의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는 K의 얼굴을 보며 소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건강해 보이고 글과 사진도 정말 좋은데, 영상을 만드시겠다니, 무슨 일 있으세요?”

소율의 말에 K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언젠간 일어날 일, 조금 빨리 하는 거죠.”

영상 잘 만들어 주세요. 적당하게 말을 돌리는 K의 말투에는 더 묻지 말라는 암묵적인 경고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지만 명확하게 그어진 선을 느끼며 소율은 입을 다물었다. 이쯤에서 그만하라는 것이겠지.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의 어둠을 애써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소율은 불안했다. 그날 이후로 K와 소율은 동네 책방에서 종종 만났다. 의미 없는 대화들 –영화, 책, 맛집 등등- 을 이어 나가며 그들 나름의 친목을 다져갔다. 대화를 통해 알게 된 K는 개츠비와 앵무새와 록밴드를 좋아하는 독특한 아이였다. 외모로 보나, 풍기는 아우라로 보나 K는 유난히 눈에 띄는 아이였고 타인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초판본을 구하는 게 소원이라는 K. 자신이 좋아하는 록 스타의 사진을 보여주고 록 스타들의 재미있는 일화들을 말해주는 K. 그런 이야기들을 할 때마다 K의 눈에는 생기가 넘쳤다. 그런 K를 보며 소율은 K가 죽지 말고 살아 있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계속 함께 동네 책방에서 책을 읽고 싶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영상이 다 만들어지면 정말 K는 죽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K의 영상이 완성된 날 소율은 영상이 담긴 USB를 K에게 건넸다.

“이 영상이 K씨에게 관상용이었으면 좋겠어요.”

죽지 말라는 말을 돌려 말하며 소율은 농을 치듯이 말했다. 나름 잘 만들었으니까 관상용으로 충분히 소장 가치가 있거든요. 소율의 말에 K는 웃더니 그러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자신의 영상을 관상용으로 두는 모양인지, 영상을 받은 뒤에도 K는 일주일에 두세 번 동네 책방에 왔다. 정해진 요일, 정해진 시각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소율과 만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가끔 책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K의 뒷모습을 보면 소율은 안도감이 들었다. 종종 시간이 맞아 K와 함께 책방에서 책을 읽고 인근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거나 카페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 날 소율은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영상 편집을 하곤 했다.

“3년 전에 한번 자살 시도 했어요.”

갑작스런 K의 말에 소율은 깜짝 놀라 K를 바라보았다. 오늘 날씨가 참 좋다, 라는 식의 말투로 K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수면제를 20알 정도 먹었는데 금방 잠에 들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멀쩡하더라고요. 정신은 몽롱했지만요. 친구가 경찰에 신고해서 부모님께 알려지고, 결국 응급실에 가서 위세척 했는데 자살하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위세척이 더 아프더라고요.”

근데 여기 커피 정말 맛있네요. 덤덤하게 말을 끝맺으면서 커피를 마시는 K를 보며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소율은 손을 뻗어 K의 손등을 아주 잠깐 꽉 잡아주고는 자신의 몫의 케이크를 K쪽으로 밀었다.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다가 K가 동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소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서툰 위로를 보냈다. K는 그런 소율의 행동에 희미하게 웃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며 ‘K씨’라는 호칭이 ‘K’로, ‘소율 씨’라는 호칭이 ‘소율 언니’로 변하며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 말을 놓았다. 번호를 교환하고 서로의 자취방에 놀러가서 밥을 해먹거나 각자 작업을 하곤 했고 함께 국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둘은 서로에게 있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소울메이트가 되었다. 소율은 K가 좋았으나 그녀에게 있어서 딱 한 가지 견딜 수 없는 게 있었는데 K는 우울증이 심해서 자해를 자주 하곤 했다. 손목, 허벅지 안쪽 등등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에 흉터가 겹겹이 쌓여갔다. 감정 기복이 심한 날에는 약을 몇십 알씩 먹고 응급실로 직행하는 날이 잦았다.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라는 소율의 말에 K는 병원에는 가기 싫다고 딱 잘라 말했다. 권위 의식이 있는 의사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자신의 고통을 아는 척하는 게 꼴도 보기 싫다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했다. 얼마나 힘들면 그랬을까 싶다가도 제발 좀 적당히 하라는 심정이 작게나마 있었다. 이 정도면 정신적으로 힘든 게 아니라 그 힘듦에 취해 있고 그걸 넘어서 즐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곤 했다. K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듯이 행동했지만 소율이 보기엔 K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어른인 척하는 철없는 어린 아이 같았다.

‘소율 언니 미안. 나 응급실이야.’

소율은 욕을 짓이기며 K가 찍어준 위치의 응급실로 향했다. 접수처에 K의 이름을 대고 알려준 병실의 호수를 찾아갔다. 창문 옆 침대에 누워있는 K의 손목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잘 꿰맸다며 괜찮다고, 걱정시켜 미안하다는 K의 말에 소율은 이곳이 6인실 병실인 것도 잊어버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언제까지 이럴 거야? 퇴원하면 당장 병원부터 가봐.”

“걱정시켜서 미안해. 정말 힘들어서 이랬어. 다음부터는 안 할게. 하지만 병원은 못 가겠어.”

꼬리를 내리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K의 말에 소율은 기가 찼다. 화가 나는 걸 넘어서 이제는 지쳤다. K가 좋지만 그와 별개로 K의 이런 면은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소율은 K 침대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네가 이러는 거 조금 지친다. 병원에 가지도 않고 계속 이러는 거, 옆에서 보기엔 힘들어. 말 나온 김에 말 좀 하자면, 요즘 내 주변 사람들이 네 얘기를 많이 해. 너랑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 처음에는 그 말을 듣지 않았어. 하지만 최근 들어서 툭하면 약 먹고 자해하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하고 또 이러는 거, 지긋지긋하고 솔직히 이러는 거 정말 애 같아서 싫어.”

화를 억누르며 말을 하려고 했지만 점점 격해지는 마음에 소율은 마음속에 있었던 말들을 쏟아냈다. 가만히 말을 듣던 K는 소율을 노려보더니 돌아누웠다.

온전히 자신을 거부하는 듯한 무언의 몸짓에 소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을 나갔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K를 상대하기도 싫었다.

소율이 K를 만나지 않은지가 한 달 정도 지났다. 그 당시에는 화가 나서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자신도 K에게 그리 잘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환자를 두고 말을 쏘아붙인 것 같아서 마음에 좋지 않았고 그녀에게 미안했다. K에게 긴 문자를 보내 봤으나 답장이 없었다. 자기 딴에도 단단히 화가 난 건가 싶다가도 K처럼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데 자신처럼 화가 안 나는 사람이 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 뿐이었고 결국 미우나 고우나 K는 소율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소울메이트였다. 다시 만나서 천천히 얘기를 하고 오해를 풀고 싶었으나 몇 주째 동네 책방에 나타나지 않고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K 때문에 불안해진 소율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뜻밖에도 K의 아버지였다. K의 소재를 묻는 소율의 말에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는 K의 소식을 K의 아버지는 힘겹게 전했다. 악문 이 사이로 새어 나오는 K 아버지의 울음이 소율의 고막을 찢어 갈기는 듯했다.

멀쩡히 살아있던 K가 죽었고, 이제 동네 책방에서 함께 책을 읽는 일도 같이 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수다 떨 일도 없을 것이다.

사후 영상 편집을 하면서 소율은 자신이 죽음에 대해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친구의 죽음을 막상 맞닥뜨리니 그 충격이 감당이 되지 않았고 믿겨지지가 않았다.

K의 무덤에는 자신이 제작한, 환하게 웃고 있는 K의 영상이 펼쳐져 있었다. 만약에 자신이 그때 병원에서 K에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정신병을 가진 K라는 자신의 고정 관념을 버리고 진심으로 K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다가가려고 했다면 K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곤 했다. 환각은 그때쯤 보이기 시작했다. K는 소율에게 왜 자신을 막지 않았냐며 악을 쓰곤 했다.

“네가 죽인 거야.”

K의 환각은 그렇게 말하며 소율의 목을 조르곤 했다. 동네 책방에서 혼자 캑캑거리고 있는 소율을 보며 동네 책방 주인과 단골들은 처음에는 혼비백산하며 그녀를 도우려 달려왔지만 눈치껏, 조금씩 사정을 알게 되며 자기들끼리 수근거리곤 했다. 미친년이 종종 여기 와서 지랄하니까 손님들이 안 온다고 작게 불평하는 동네 책방 주인은 소율을 정신병자 보듯이 보았고, 오래전부터 이 책방의 단골이었던 사람들은 소율이 그 여자와 뭔가 있었던 게 아니냐며 자신들만의 스토리를 짜내고 있다.

네가 죽인 것도 아닌데 왜 이러냐며 걱정을 하던 가족과 주변 지인들의 권유에 따라 소율은 반강제로 상담을 받았다. 주변의 압박으로 끌려오듯이 상담을 받으러 오는 것은 자신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제 발로 찾아오는 것보다 치료의 과정이 더 길고 어려운 법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인복은 타고났다는 말을 듣던 게 맞는 모양인지, 그녀의 상담의로 지정된 한이수 상담의는 내담자의 진심을 이끌어내는 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를 이해하는 척을 하며 권위적인 의사의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인간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소율은 예전에 K에게 다가가려는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무서우면 도망쳐도 돼요. 회피해도 되고요. 하지만 준비가 되면,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돼요. 그때까지, 준비될 때까지 제가 소율 씨를 도와줄게요.”

환각을 보는 이유가 죄책감이라고 말해주며 한이수 상담의는 그녀와 함께 발을 맞추어 나갔다. 약을 먹으면 환각이 보이는 빈도수가 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K를 볼 때마다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끔씩 이런 상담도 못 해먹겠고, 환각도 지긋지긋하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소율을 잡기보다는 그냥 소율이 마음을 다잡고 되돌아 올 때까지 한이수 상담의는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당연히 치료 과정은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되돌아보는 걸 연습한 덕분에 어느새 소율도 모르게 치료는 성큼성큼 진행되어져 갔고, 그렇게 K와 작별할 날이 왔다.

소율은 동네 책방으로 향했다. 천천히 눈을 뜨니, 동네 책방 앞에 있는 K가 보였다. 소율은 가방에서 너덜너덜해진 위대한 개츠비를 K에게 꺼내 주었다.

“우리 여기서 처음 만나고, 여기서 마지막으로 인사하네.”

K는 위대한 개츠비를 받아 들고는 피식 웃으며 소율에게 말했다.

“언니. 이제 나 보지 마.”

“그래. 잘 가. K.”

K는 2년 전처럼, 소율의 기억 그대로 명랑한 우울함을 내뿜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아예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K가 있던 자리에는 위대한 개츠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개츠비처럼 자신의 초록 불빛을 선망하다가 가버린 K를 잊기도, 잊지않기도 힘들겠지만 계속 이렇게 살아가면 될 것이다. 소율은 개츠비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몸을 돌렸다.

안녕, 나의 개츠비.

박소진(예술 1)

우효빈(인문 2)



댓글 [ 0 ]
댓글 서비스는 로그인 이후 사용가능합니다.
댓글등록
취소
  • 최신순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