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그 누가 용서하는가 (한성대신문, 511호)

    • 입력 2016-07-18 19:50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귀향은 역시나 충격적이었다. 우리 할머니 세대에서 벌어진 참극. 더구나 그것은 열 네 살, 열다섯 살의 연약한 소녀들에게 결코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었다. ‘시대적 비극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인류사 최악의 만행을 일본은 저질렀고 우리는 당했다. 소녀들이 겪은 일들을 스크린에 마주하면서, 이미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는 불가능한 것임을 생각했다.
일전에 음주운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한 청년이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를 당해 한 쪽 다리를 잃었다. 그 청년은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연인과 결혼을 약속한 미래가 촉망받던 사람이었으나, 음주운전이라는 무책임한 행위 때문에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고의 가장 큰 난점은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중대하게 침해한 가해자가 쉽게 용서받은 것에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는 법원에만 반성문을 제출하고 공탁금 3000만원을 걸었는데, 재판부가 이를 두고 가해자가 반성하고 있고 공탁금을 걸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 결과를 보고 피해자는 망연자실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법이 무슨 권리로 그를 용서해요?”
피해자보다 앞서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들이 겪은 고통과 억울함을 누구의 잣대로 보상을 결정한다는 말인가? 그 누구의 뜻으로 용서를 허한다는 말인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자격은 누가 주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당사자는 없고 대리인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다른 누군가가 용서하는 것심지어 진심어린 사과도 없이을 바라보며 실망과 부당함을 느끼는 것이다. 피해자는 인생이 뒤흔들리는 몸과 마음의 상처를 짊어지고 억울함에 치를 떨게 되지만, 가해자는 거짓된 용서로 구원받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인생을 시작한다.
소녀들은 아직 용서하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정부가 20151228일에 발표했던 군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 피해 당사자인 본인들과 사전 협의 없이 이루어진 협상이라며 인정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소녀들이 용서하지 않는 한, 그 누구에게서도 일본은 용서받지 못한다. 설령 그것이 신이라고 해도 말이다.

강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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