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수세를 공세로, 한산 속 승리의 공식 (한성대신문, 580호)

    • 입력 2022-08-2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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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2-08-29 00:01

<편집자주>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누구나 한 번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을 다룬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 후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극중 관객 대다수의 초점은 거북선에 쏠려있지만, 사실 이날 승리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요소가 일조했다. 500여 년 전, 한산도에는 어떤 과학적 요소가 숨어있었을까?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한 발 앞선 전쟁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일본 열도를 하나로 병합한 후 조선을 침략하는 상황이었다. 전국을 하나로 통일한 후 충분한 병력을 지니고 있던 왜군의 전쟁 방식은 백병전이었다. 적선의 배 위로 올라가 조선군과 육탄전을 벌인 것이다. 당연하지만 조선군이 기존에 쓰던 배는 갑판이 노출된 구조이므로, 적군이 쉽게 넘어올 수 있어 일본의 이러한 전략에 취약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바로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대표적 특징인 닫힌 지붕 개판으로 왜군의 배가 근접해도 백병전을 막을 수 있게끔 만들었다. 강희진(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친환경연료추진연구본부) 본부장은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으로 배가 서로 붙었을 때 적선으로 타고 넘어가는 백병전을 선호했던 왜군의 전쟁 방식은 소용이 없었다”고 전했다.

선박을 구성하는 재료에 따른 상이한 견고성 역시 전투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는 적송, 왜군은 삼나무가 많이 자라는 환경이었기에 배의 주된 재질은 이를 따라갔다. 삼나무보다 두께와 무게가 월등했던 적송은 우리나라가 전투에서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물리적 이점을 만들었다. 제장명(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소장은 이를 “재질 차이가 배의 견고성에 차이를 만들었다”며 “화포 발사 시 반동력 흡수와 배가 부딪히는 상황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재질 이외에도 배의 설계 방식 역시 견고함에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의 판옥선과 거북선은 짜맞춤 구조를 통해 제작됐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더불어 사용된 전투선으로, 방향 전환에 용이한 평평한 배밑과 각 배의 장수가 진두지휘할 수 있는 최상층의 판옥(옥상)이 가장 큰 특징이다. 짜맞춤 구조는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와 나무가 결합하는 제작 방식이다. 못 역할을 하는 나무 부품과 함께 각 부품을 덧대 견고성을 높인 것이다. 쇠못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초기에는 나무 사이에 공간이 있어 틈이 보이지만, 이는 나무가 물에 불어날수록 빈공간이 메워져 단단해졌다. 반면 왜군의 배는 쇠못을 사용해 배를 조립했기에 시간이 갈수록 부식돼 활용 기간이 짧았다. 홍순재(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배의 주재료인 소나무가 두껍고 튼튼한 것은 물론,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와 나무가 맞물려 연결되는 구조는 강도 높은 배를 만들 수 있는 원리였다”고 밝혔다.

보이지 않는 무기

조선군이 적에게 피해를 주는 주요한 방법은 화포를 통해 배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적선이 무력화된다면 병력의 열세와 무관하게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어 이러한 전략이 조명 받았다. 당시 주로 사용된 화기(火器)인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은 조란탄 등을 포탄으로 사용했다. 조란탄은 지름 약 2.5cm 크기의 산탄(霰彈)으로, 돌과 철 등으로 제작해 납을 씌운 것이 특징이었다. 조란탄을 비롯한 당시 포탄은 화약을 통한 폭발을 이용하는 현대 포탄과 달리 물질에 닿아 직접 충격을 주는 방식이었다. 화약의 폭발이 아닌 물리적 충돌 자체를 통해 피해를 준다는 특성상 운동에너지가 강할수록 그 피해량 역시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적용된 것이 뉴턴의 제2법칙이라고 불리는 ‘F=ma’으로, 질량(m)과 속도(a)를 곱한 것이 운동에너지(F)라는 공식이다. 즉 유효한 파괴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중량과 속도를 충족해 운동에너지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강 본부장은 “화약 폭탄 역시 사용됐지만, 당시 문헌 기록에 따르면 쇠 조각을 뭉친 파편과 덩어리 등을 발사하며 개방된 공간의 적군에게 직접적 피해를 입히는 방식이 주요한 전략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물리적 충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속도를 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출발과 도착 지점 사이의 거리 파악이 필수불가결했지만, 현재처럼 고도로 발달된 첨단 과학은 사용할 수 없었다. 당시 사용된 측정법은 바다에서 섬을 바라보는 거리를 계산하는 ‘망해도술’이었다. 하나의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망해도술은 뭍과 물 사이의 거리를 모두 측정해 정확한 거리의 파악이 가능했다. 이때 직선과의 거리를 구할 수 있었던 방법은 하나의 직각삼각형 속 닮은 삼각형 간의 비율을 이용하는 것으로, 닮은 삼각형의 ‘닮음의 비’를 이용해 하나의 계산으로 다른 길이를 수월하게 구할 수 있었다. 시작점(섬)에서 다른 꼭짓점(배)까지 거리를 파악한 후 이를 바다의 다른 지역(적선)에도 적용한 것이다. 김형원(천종현수학연구소) 집필팀장은 “실제 전쟁에서 망해도술이 사용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 진영에서 싸웠다는 이점이 있었다”며 “미리 한산도 지형을 파악한 후 계산된 사정거리 내에 들어온 적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던 것”이라고 전했다.

한산에 진을 친 학

아무리 견고한 배와 날카로운 포격이 갖추어진들 해전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요소는 해류였다. 더불어 유연한 전술 기동을 위해 바다 위에서의 방향 전환이 용이해야 했으며, 이는 배밑의 형태에 따라 결정됐다. 한산도 대첩 당시 왜군의 배는 백병전을 준비했기에 최대한 많은 병사를 빠르게 나를 수 있어야 했다. 더불어 정면에서 부딪히는 파도를 잘 가를 수 있도록 배밑이 뾰족하고 가벼운 형태를 유지해 빠른 기동성을 확보했다. 강 본부장은 “당시 왜군이 사용한 배는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로, 가벼운 무게와 뾰족한 배밑의 구조”라며 “이는 이동에 용이했지만 전쟁 중 방향 선회 등의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주력선이었던 거북선과 판옥선은 방어를 하는 입장이었기에 먼 바다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장거리 이동 대신 방향과 전술의 재빠른 변화가 필요했기에 유연한 변동이 가능한 배의 구조를 채택했다. 이에 평평한 배밑의 형태로 배를 제작하며 배의 방향과 진영을 순식간에 바꾸는 방향을 택했다. 제 소장은 “당시 적선과 아군의 수적인 차이에도 전술을 위해 빠르게 진영을 바꿀 수 있는 배의 구조가 성공적인 전투를 이끌었다”고 밝혔다.

유동적 움직임이 보장된 상황에서 한산도 대첩에 사용된 전술은 ‘학익진’이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을 진(陣)으로 나타낸 전술로, 수비하는 입장에서 공격이 가능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유인을 통한 수적 열세의 극복이 학익진의 첫 발걸음이었다. 선회가 어려워 일단 유인에 성공하면 다시 돌아가기 어렵다는 왜군의 특징을 고려해 진을 친 장소로 적군을 이끌어낸 것이다. 반면 학익진을 펼친 우리나라 배는 방향의 선회가 용이했으며, 이 때문에 전투 초반 전방을 응시하던 뱃머리를 옆 방향으로 선회하며 극적인 진형의 변화가 이뤄질 수 있었다. 화포가 달린 배 측면이 왜군을 바라보는 진형으로 바뀌며 수적인 열세의 극복은 물론, 도리어 왜군이 격추 가능한 범위 내에 응집된 상황이 가능했다. 홍 연구사는 “왜군의 배와 달리 방향을 쉽게 틀 수 있다는 장점은 적군을 유인하다 순식간에 공격진으로 변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 소장은 “한산도 대첩하면 거북선을 가장 많이 떠올리지만 당시 거북선은 단 두 대뿐이라 학익진 양 끝에서 진영을 지키는 역할 정도만을 수행했다”며 “결국 한산도 대첩은 수적 열세를 극복한 과학적 요소와 전술의 승리였다”고 전했다.

이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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