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일이다. 당시 나는 동아리 활동 중 부원들과 함께 행사를 진행할 일이 있었다. 부원 중 한 명이었던 A는 평소 눈치가 없고 고집이 센 성격이었지만, 본성이 악한 편은 아니라 다른 부원들과 원만히 잘 지냈다. 그런데 또 다른 부원인 B는 A를 무척 싫어했다. 그 이유는 그저 ‘A를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B는 단순히 A를 싫어하기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A를 ‘행사 준비에 방해가 되는 사람’으로 몰아가 갈등을 조장한 것이다. 나는 “A를 이해할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B를 보며 생각했다. ‘B 자신도 타인에게 이해받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단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A를 배척한 B의 행위는 물론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 한 번도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서’ 배척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매년 퀴어축제에 대한 인터넷 기사에는 ‘성소수자니 뭐니 하면서 관심 끌려고 하지 말고 너희끼리 조용히 놀아라’와 같은 댓글이 달리곤 한다.
실제로 지난 9월 8일,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교수 연구팀이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98%(298명)가 ‘부모는 너희를 낳은 걸 후회할 거다’와 같은 폭언을 들었다고 답했다.
동성애 혐오뿐만이 아니다. 청소년 혐오, 노인 혐오, 이성 혐오 등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나와 다른 이들을 배척해왔다. 실상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는 B와 같은 우를 범한 적이 없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이해’를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일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그것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내 작은 우물에 세상을 끼워 맞추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혐오 공화국’이 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작은 우물에 큰 세상을 욱여넣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크기에 맞춰 우물을 넓히려는 노력, 즉 ‘존중’하려는 자세가 아닐까.
정명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