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최근 영화 ‘뮬란’을 두고 논란이 거세다. 영화 ‘뮬란’은 1998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뮬란’을 실사화한 작품이다. 차별과 고난을 딛고 일어서 승리하는 성장 스토리였던 애니메이션과 달리 서양의 시각으로 바라본 동양 무협 영화라는 것이 주된 논란이다. 부정확한 역사 고증, 동양에 대한 제작사의 이해 부족도 지적됐다. ‘뮬란’의 논란과 함께 단어 하나가 주목을 받고 있으니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주진솔 기자
기존의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연구 전반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바이런은 1812년 출판한 장편 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에서 이와 같은 뜻으로 오리엔탈리즘을 사용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의미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뜻으로 바뀐 것은 1978년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이뤄졌다. 그는 책에서 ‘서양이 동양을 왜곡하고 잘못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오리엔탈리즘을 정의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인류의 평등을 외쳤던 독일의 사회 운동가 마르크스가 동양인을 표현한 말이다. 19세기, 마르크스 외에 많은 서양 학자는 동양 을 미개한 존재로 표현했다. 학자의 생각은 곧 대중에게 퍼졌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시기에 서양에서 만들어진 동양에 대한 시각이었다.
뿌리 깊은 오해
에드워드 사이드는 근대에 만들어진 서양의 시각에 집중했지만, 서양이 동양을 왜곡한 역사는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양과 서양이 처음 만난 것은 기원전 5세기 경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다. 이때 처음 ‘오리엔트’라는 단어가 생겼다.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뜻의 오리엔트는 서양이 처음으로 동쪽이라고 인식했던 곳인 서남아시아, 오늘날의 중동 지역을 가리켰다. 당시 이 지역은 페르시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양 지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스인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오리엔트풍을 격하했다. 그들은 그리스가 문명이 발달해 평등하고 자유로운 곳이지만 페르시아는 그러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아테네의 수학자 이소크라테스는 “페르시아 인은 그리스인의 지배에 감사할 것”이라며 페르시아인을 무시하기도 했다.
현실은 달랐다. 페르시아는 오히려 그리스보다도 평등한 국가였다. 그리스인은 자신이 평등하고 자유롭다고 말했지만, 그리스 대부분의 도시는 노예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아테네의 경우 인구의 80%가 노예 신분일 정도로 자유와 평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에 페르시아는 노예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는 왜 페르시아를 격하했을까? 그리스는 전쟁의 승리로 불안했던 내부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하나의 제국으로 뭉쳐있던 페르시아와 달리, 그리스는 개별적인 도시국가로 이뤄진 연합체였다. 공공의 적이었던 페르시아를 물리치면서 도시국가들 사이에 ‘그리스’에 대한 소속감이 발생한 것이다. 하나가 된 그리스는 주적이었던 페르시아와 그들이 갖고 있었던 오리엔트 문화를 무시하고 격하했다.
동양과 서양이 다시 크게 충돌한 것은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중부 유럽으로 진출한 때다. 유럽 학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이 외설과 향락을 즐긴다고 묘사했다. 당시 생긴 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인 예시가 하렘이다. 여러 여성이 나체로 술탄 한 명을 기다리는 모습이 유럽인의 상상 속 하렘이었다.
현실은 이와 달랐다. 오스만 제국의 국교인 이슬람교의 율법은 남녀가 사적으로 만 나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하렘이 생긴 이유도 율법 때문이다. 하렘은 남녀를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한 장소였다. 제국의 우두머리인 술탄조차 그곳에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기독교를 믿는 유럽과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오스만 제국은 상극이었다. 더구나 유럽과 오스만 제국은 맞닿아있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충돌이 잦았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이 이교도라는 이유로 오랜 기간 그들을 혐오하고 있었다. 15세기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의 가파른 성장세는 유럽인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남동부 유럽과 서남아시아를 정복할 만큼 강대국이었다. 오랜 기간 유럽 내에 쌓여온 혐오감과 공포가 오스만 제국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17세기 유럽은 말 그대로 중국 열풍이었다. 프랑스 선교사 덩트레꼴르는 주변인에게 중국에 대한 많은 양의 편지를 썼다. 그의 편지를 기반으로 작성된 보고서 속 중국은 매우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중국인은 항상 현명하고, 자연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선교사가 중국을 환상 속 공간처럼 표현했다.
서양의 인식과 달리 중국은 완벽한 공간 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왕조 교체 시기였다. 숱한 전쟁과 전염병으로 온 국민이 고통 받았던 것이 당시 중국의 현실이었다. 선교사가 중국을 환상적으로 표현한 이유는 본국의 재정 지원을 계속 받기 위함이었다. 유럽 선교사가 작성한 중국 보고서는 중국을 경험해보지 못한 유럽인에 의해 편집·출판됐다. 선교사가 왜곡한 중국의 모습은 유럽의 학계까지 전파됐다. 진태원(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은 “부족하고 간접적인 중국 연구는 서양인의 상상력에 의해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앞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분석한 것처럼 19세기는 유럽인의 오리엔탈리즘이 절정을 맞은 시대다. 당시 유럽 학계는 자신들의 문화권을 서양으로, 아프리카를 제외한 비유럽 문화권을 동양으로 구분했다. 그들의 사상 속에서 동양은 미개하고, 서양은 동양에 비해 훨씬 우월한 모습이었다.
배경에는 제국주의가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됐다. 타국을 지배하려는 유럽에게 동양의 미개함은 좋은 핑계로 자리 잡았다.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은 일반 대중들에게도 전파됐다. 김상회(한백문화재연구소) 연구소장은 “서양은 동양을 잘 알지 못하는 일반 시민에게 동양을 열등한 존재로 가르쳤다”고 설명했다.
오리엔탈리즘이 걸어온 길
기원전에 있었던 그리스-페르시아전쟁부터 19세기의 제국주의까지 서양이 동양을 왜곡한 역사는 매우 길다. 주체와 이유는 시대마다 다르지만, 왜곡의 배경에는 동양을 깎아내려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었다. 왜곡의 주체는 당위성을 활용해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만들어낸 동양의 모습을 널리 전파했다. 일반 시민에게 퍼진 동양 왜곡은 보편적인 시선으로 나아갔다.
시대가 바뀌면서 동양 왜곡의 당위성이 많이 사라졌지만, 과거에 왜곡된 동양의 모습은 아직도 남아있다. 특히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전파했다는 점이 서양이 만든 동양의 모습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했다. 영화 ‘뮬란’으로 촉발된 오리엔탈리즘 논란 역시 긴 시간 퇴적된 왜곡의 결과물이다. 22년 만에 애니메이션 영화 ‘뮬란’이 실사 영화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논란에 사로잡혀있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깊은 뿌리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