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눈에 들어온 영상이 하나 있다. 명문대 출신의 중증 장애인 청년이 장애인 관련 정책에 대해 말하는 영상이다. 결국 누구라도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산이 많아도, 외모가 뛰어나도, 박식해도 결국은 늙고 병드는 수순을 밟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은 알게 모르게 계속 서로 키 재기를 하며, 상대를 평가한다. 이것은 소통을 막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때, 사람에 필요한 것은 ‘공감적 경청’이다. 공감적 경청은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그의 감정까지 깊이 공감해주는 것이다. 상대의 말에 꼭 동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의 입장이라도 들으려 노력한다는 말이다. 공감적 경청은 지식으로 배워서 아는 것보다 자주 실천하는 게 더 중요하다.
입장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차별도 어쩌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장애인 문제와 같은 타인의 아픔에 순간 눈을 돌리지만 하나의 자료처럼 지나가 버리는 얄팍함은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처럼 본인 스스로도 소심하고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학 역시 공감적 경청을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대학은 벚꽃이 지는 순서대로 대학이 사라진다는 벚꽃 괴담과 급변하는 교육 상황 속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은 소통의 선을 어디까지 잡아야 하는지 몰라 고민한다. 소통의 과정은 쉽지 않고, 다 설명하는 게 불필요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무서운 사실은 불통의 결과가 가시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불통은 차곡차곡 쌓여서 오래된 곰팡이처럼 벽이나 천정에서 누수를 일으킨다. 집을 수리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누수처럼 고치기 힘든 요소도 없다. 누수로 인해 결국 대대적인 공사를 실행하게 된다.
이제는 공람하는 정보도 많아지고 소통의 창구도 많아졌다. 다들 어려운 시기이고 비대면 소통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성대신문도 그 중간에서 중요한 소통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얄팍한 성정과 사유를 들키지 않기 위해 공적인 글 이외는 쓰지 않으나 한성대신문의 숨은 독자이기에 두서없는 글을 쓰게 되었다. 학생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 앞으로도 학교 신문을 잘 보고, 수업 공지글의 문체도 다듬고, 소통보다는 전달만 하고 싶은 마음도 다듬어야겠다.
이희영(상상력교양대학 기초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