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현실과 이상의 괴리, 기초학문 ② (한성대신문, 578호)

    • 입력 2022-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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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2-05-15 23:02

‘상경계열 우대’, ‘이공계열 우대’. 기업들이 내놓는 신입사원 채용공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격요건 중 하나다. 하지만 그중에 기초학문을 전공한 학생들을 우대해 채용한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초학문이란 응용학문의 밑바탕이 되는 학문으로, 주로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을 일컫는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기초학문이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별다른 충격을 안겨주지도 않는다. 이런 추세는 ‘지식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에서까지 예외가 아니다. <한성대신문>은 기초학문이 당면한 위기와 원인을 알아보고, 문제를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3호에 걸쳐 기획 기사를 송고한다.

한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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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학문의 발전이 모두와 연계된 것을 사회 구성원 전체에 인식시켜야 한다"

본지 577호「 어두운 현실 아래, 기초학문 ①」에서는 기초학문의 어려운 현실을 깊이 들여다봤다. 기초학문을 전공하는 학과는 수시로 정원 감축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막상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자가 되더라도 이를 소화시킬 자리가 없다는 것이 현 한국 사회에서 기초학문이 가지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근본적으로는 대학을 ‘취업을 위한 징검다리’로 인식하는 뿌리 깊은 한국 사회의 풍토가 기초학문 위기를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대학교는 본디 취직을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공간이 아닌, 학문을 교육하고 학자를 양성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대학평가인 <중앙일보>의 대학평가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이러한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평가의 ‘학생 교육 노력 및 평가’ 부문에서 가장 큰 배점을 가진 항목은 ‘순수취업률’과 ‘유지취업률’로 각각 18점을 차지한다. 이는 전체 80점 중 절반에 가까운 비중이다. 대학의 ‘학생 교육’을 취업률로 평가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일반인과 인식을 같이 한다. 인하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이예원(25) 씨는 “대학이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한 디딤돌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며 “대학을 평가할 때 그 기준이 취업률이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변질된 대학의 목적 때문에 학생들에게 선호되는 학문은 순수학문이 아닌 응용학문이다. 실제로 작년 2월 서울 주요 15개 대학의 대학알리미에 공시된 자료에 따르면, 인문계열 2018년 졸업생 취업률은 64.6%로 77.7%인 2018년 공학계열 졸업생 취업률과 현격히 비교되는 수치를 기록했다.

더욱이 최근 응용학문 계열 학과는 기업과 협약을 맺어 ‘100% 취업 보장’을 슬로건으로 내걸며 취업 강자로서의 면모를 강화하고 있다. 대학알리미에 공시된 ‘2018년 전국 대학 계약학과 설치 운영 현황’에 따르면, 해당 연도에만 전국에 채용조건형 계약학과로 설치된 학과는 총 21개에 이른다. 채용조건형 계약학과는 기업이 요구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함으로써 해당 학과생이 해당 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보장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이 협약하는 고려대학교 반도체공학과, 성균관대학교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경북대학교 IT대학 전자공학부 모바일공학전공 등이 대표적인 예다.

순수학문 계열 전공은 이런 현실과의 타협에 현재까지는 실패한 것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기초학문도 발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녹아들 필요성이 있다고 충언하기도 한다. 기초학문이 다른 학문 혹은 사회와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맥락이다. 류웅재(한양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대학은 내부적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 등 기초학문의 학제적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사회의 변화와 필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융·복합 커리큘럼과 교육을 강화하는 방식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다”면서 “기초학문이 이러한 현실지향적인 응용학문의 튼실한 토대와 이를 통한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된다는 면에서, 그 중요성은 급격한 기술진보가 일어나고 있는 사회 변화의 출렁임 속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기초학문이 퇴행하는 요인으로 ‘수도권정비계획’이 꼽히기도 한다. 이 규제는 수도권 대학들이 학생 총원을 늘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 본래 대학, 기업, 공장 등의 수도권 집중을 막고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달성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지만, 이것이 도리어 대학에서는 기초학문 학과의 구조조정 장벽으로 존재하고 있다. 정해진 총원 내에서 여러모로 이득으로 작용하는 응용학문 학과의 총원을 늘리기 위해 기초학문 전공의 정원을 줄인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모든 대학을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대학기본역량진단’ 역시 기초학문 학과가 고전하도록 만든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초학문의 특수성을 도외시하고 동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기초학문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손동현(우송대학교 교양대학) 학장은 “애초에 모든 학교를 획일화된 방식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며 날을 세웠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구조조정 역시 고스란히 기초학문 전공 학과가 감당해내야 하는 몫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초학문 전공 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응용학문의 부전공 혹은 복수전공을 피해갈 수 없는 실정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인문계열 졸업생 42.5%가 상경계열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다. 이어 인문계열과 자연계열 주전공자는 상경계열을 복수전공할 경우, 단일전공 학생보다 취업 성과가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양질의 전공자 양성이 힘들어진다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현상이다. 손 학장은 “기초학문 전공에 적을 둔 학생들에게 부전공 혹은 복수전공을 하라는 이야기를 따로 하지 않아도 이미 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상황을 밝혔다.

또한 정부의 턱없이 부족한 재정·정책적 지원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2022년 한국연구재단의 전체 지원 예산 8조 2,870억 원 중 인문사회 분야 학술연구 지원액은 2,416억 원에 불과하다. 노벨상을 수상한 주요 연구 성과들도 평균 30년이 넘는 기간이 걸린 것을 고려하면, 기초학문에서의 성과는 오랜 시간이 소요돼 기업의 투자가 어려우니 정부의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박정하(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소장은 “정부의 재정적 지원은 기초학문 부흥에 필수조건”이라고 전했다.

재정 지원을 무기로 대학평가를 통해 대학을 제어하려는 정부의 모습 역시 비판 받는다. 대학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교육부 통제가 조금은 느슨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민경찬(연세대학교 수학과) 명예교수는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인재를 요구하므로 새로운 교육과 연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고 그를 빌미로 대학을 평가하는 체제는 무너져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 교수는 “대학원 역시 모든 학과의 대학원이 모든 학교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며 “대학의 자율성을 존중해 학문 연구의 연합체를 형성하고 특성화 대학원이 요구되는 시점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기초학문 몰락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사회적으로 기초학문의 중요성에 대해 합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학계는 전한다. 민 교수는 “국가 경쟁력을 위한 산업 및 사회 발전, 생산성에 기초학문이 기여할 수 있는 점을 근거 자료로 제시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에게 설득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현재의 논문 중심적이고 양적으로 획일화된 학문 평가 시스템은 학문별 특성을 반영하기 어렵기에 발전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기초학문이 후미진 곳으로 고립되는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다음 기사에서는 기초학문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구체적 해결책에 대해 알아보자.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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