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어두운 현실 아래, 기초학문 ① (한성대신문, 577호)

    • 입력 2022-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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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2-05-15 23:04

‘상경계열 우대’, ‘이공계열 우대’. 기업들이 내놓는 신입사원 채용공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격요건 중 하나다. 하지만 그중에 기초학문을 전공한 학생들을 우대해 채용한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초학문이란 응용학문의 밑바탕이 되는 학문으로, 주로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을 일컫는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기초학문이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별다른 충격을 안겨주지도 않는다. 이런 추세는 ‘지식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에서까지 예외가 아니다. <한성대신문>은 기초학문이 당면한 위기와 원인을 알아보고, 문제를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3호에 걸쳐 기획 기사를 송고한다.

한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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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학문의 약화는 대학 기능의 쇠약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문사철’, ‘전화기’. 대학생들이 흔히 특정 학과들을 묶어서 일컫는 말이다. 문사철은 ‘문학’, ‘사학’, ‘철학’을 의미하고, 전화기는 ‘전자전기’, ‘화학공학’, ‘기계공학’의 준말이다. 문사철은 기초학문의 대표 주자인 반면, 전화기는 이른바 ‘취업깡패’로 불리는 응용학문의 학과들이다. 기초학문은 응용 학문의 기초가 되는 학문이지만, 보통 취업시장에서 외면받기 일쑤다.

기초학문 전공들은 학과통폐합 혹은 정원 축소 등의 구조조정을 겪고 있다. 2019년 <서울경제>와 종로학원하늘교육이 공동으로 전국 4년제 대학 180개를 조사한 결과, 물리학·화학·수학·생물학 등 자연계 기초과학 학과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대학은 88개(48.9%)에 이르렀다. 박일우(계명대학교 Tabula Rasa College) 교수는 “전통적인 문사철 학과가 남아있는 대학이 한손에 꼽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기초학문은 실제로 취업시장과 거리가 멀다. 2019년 4년제 대학 인문계 졸업자의 취업률은 55.6%에 불과했다. 이에 더해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에서 직업과 전공이 일치하는 경우는 30%대에 머물렀다. 사회·교육·공학 계열의 일치도가 50%대인 것에 비하면 낮은 수치다. 최근에는 취업이 어려운 기초학문 전공의 대학생들이 본인의 전공과는 동떨어진 공학 관련 분야를 복수전공하거나, 학원에 다니며 기술 자격증을 취득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하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이예원(25) 씨는 “기초학문을 전공한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경우가 드물어 취업의 벽이 더욱 견고하게 느껴진다”고 밝혔다. 류웅재(한양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기초학문이 응용학문에 비해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라며 “최근에는 부전공이나 다중 전공 등의 형식으로 기초학문과 응용학문을 복수로 공부하는 학생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며 이것이 취업에 도움을 주는 일면도 존재한다”고 전했다.

낮은 취업률은 고스란히 학생의 비선호로 이어졌다. 대입부터 학과에 대한 선호도 차이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학 입시 전문 업체인 진학사에 따르면, 서울시립대학교의 작년 수시 학생부종합전형 경쟁률은 응용학문인 컴퓨터과학부가 19.44, 기초학문인 물리학과가 8.43을 기록하며 큰 차이가 벌어졌다.

기초학문은 결국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호되지 않는 상황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즉 공공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연구를 이어나갈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현재 국내의 기초학문 연구는 정부의 지원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 역시 곧장 성과가 드러나는 응용학문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연구개발비의 목적이 ‘경제발전’인 연구의 투자 비중은 OECD 평균이 23%인 반면, 우리나라는 49%로 단연 최고를 기록했다. 류 교수는 이를 “성공 가능성이 높고 수익성이 담보되는 기술 관련 연구나 응용과학은 공공성을 염두에 둔 정부 지원이 없더라도 기업을 비롯한 민간에서 충분한 투자나 지원을 확보하기가 용이하다”고 말했다.

학문의 가치를 가시적인 성과를 통해 측정하는 행태는 정부의 대학평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일례로 대학기본역량진단이 있다. 이 진단은 대학 구조조정 정책 중 하나로 ‘기준 미달’의 대학에 국가장학금 등 정부의 재정지원을 제한한다. 졸업생 취업률 등이 지표인 평가는 수치 지향적인 대학평가를 만들어냈다. 정부가 주도 하는 평가 외에도 다양한 대학평가들이 존재하나, 모두 기초학문을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박 교수는 “대학의 역량, 학생들이 교육을 통해 함양하는 능력 등을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측정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대학평가는 수치로서 측정되지 않는 이러한 지표들에 대해 점수를 매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렇다 보니 기초학문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반박하기란 어렵다. 심지어 인문학의 경우에는 학문이 도구화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류 교수는 “인문학의 본원적이거나 중요한 가치들이 훼손되거나 위축되고 있다. 현재는 인문학의 다양한 기능과 가능성을 상실 한 채 미디어와 문화산업, 경제적 가치와 성장 등 자본주의적 논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즉 도구적 성격으로 다른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 경향이 강하다”라고 설명했다.

기초학문이 응용학문과 달리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인식도 대표적인 오해다. 실제로 생물학의 기초가 되는 염기서열 분석과 PCR 관련 기법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원인과 대응책을 마련하는데 단초가 됐다.

문재인 정부는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 지원을 2배 확대했다. 하지만 이는 응급 처치로만 작용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손동현(우송대학교 교양대학) 학장은 “정책적 지원에서조차 기초학문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위기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며 “지금까지 해온 당장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재정적 지원 외에도 진정 시간을 충분히 가져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진지한 고민 없는 단순한 관련 예산 증액 정책은 오히려 대학이 자본을 중심으로 기업화되는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실제로 돈을 벌기 위해 특수대학원을 난립해 ‘학위 장사’를 하는 곳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정하(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소장은 “예산 증액이 연구 지원에만 쏠리지 않고 대학에서의 인력 운용이 확대되도록 쓰이게 해야 한다”며 “학문을 계속 연구할 후속 세대를 길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초학문의 퇴보는 대학원의 몰락으로부터 시작된다. 대학원은 연구의 중심이라 불리는 기관이지만 점점 인식의 변두리로 쫓겨나는 추세를 보인다. 2020학년도 서울 시내 40개 일반대학원 중 신입생 정원을 모두 채우지 못한 일반대학원은 34곳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연구가 부실해지는 현상은 대학의 위태로움과 가까워지는 일이라고 설명하며, 대학이라는 공간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나라의 핵심 경쟁력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한다. 손 학장은 “학문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장차 연구의 성과를 토대로 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대학”이라며 “응용학문 분야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현위치까지 온 우리나라의 경우 더욱더 그 바탕이 되는 기초학문이 튼튼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기초학문의 토대가 약화된다면 남는 것은 절망뿐”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학과 통폐합과 정원 축소 등의 사유로 기초학문 강의가 줄어들자 석·박사급 연구자들이 갈 곳을 잃어버린다는 점도 문제로 지목된다. 이 때문에 기초학문의 연구와 교육 수준은 갈수록 저하된다는 점에서 선진국의 일반대학연구진흥금(General University Fund) 모델을 참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 대학에서의 연구는 교수가 개인 자격으로 정부나 민간 기업으로부터 과제를 수주해 받은 연구비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개발이 경쟁적으로 이뤄지면서 정부의 대학 연구개발 지원금이 곧장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손쉬운 과제에 집중되는 경향도 보인다. 일반대학연구진흥금이란 정부가 연구진흥을 목적으로, 즉 특정한 연구를 정하지 않은 채로 전반적인 연구 활동 지원을 위해 대학에 주는 일반교부금이다. 이 기금을 통해 대학은 연구 시설과 장비를 구비하고, 연구 인력을 고용하는 등 연구 중심의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다. 실제로 일반대학연구진흥금은 연구개발 투자가 일찍이 이뤄진 선진국에서 기초연구 지원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해외 사례를 참고하지 않더라도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 규모 자체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지배적이다. 고등교육에 대한 지원 자체가 늘어난다면 기초학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받게 되는 지원도 저절로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2021년 기준으로 대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1만 1290달러지만, 이는 1만 2535달러인 초등학생 1인당 교육비와 1만 4978달러인 중학생 1인당 교육비와 비교했을 때 부족한 수준이다. 한국 대학 공교육비 공공투자는 OECD 평균의 66.2%로, 국내총생산인 GDP 대비 0.6% 수준으로 미흡하다. 손 학장은 “OECD 국가들은 초·중등 교육 지원금에 비해 대학생 지원금이 약 3배가량 된다. 우리나라는 대학생을 지원하는 금액이 가장 적은데, 교육을 위한 세금이 대학에 적게 가다 보니 시장 논리에 의해 기초학문 교육이 약화됐다”고 전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세계경쟁력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2018년에 비해 4계단 상승했지만, 동기간 교육경쟁력은 25위에서 30위로 5계단 내려갔다. 특히나 대학 교육경쟁력은 64개국 중 47위를 차지하며 부끄러운 성적표를 받았다. 기초학문을 토대로 한 교육 전반의 약화와 무관하지 않은 결과다. 우리나라의 기초학문이 이렇게까지 위기에 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기사에서는 한국의 기초학문이 위험에 빠진 근본적 원인을 살펴보도록 하자.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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