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사는(living) 방식이 사는(buying) 방식으로 (한성대신문, 536호)

    • 입력 2018-09-03 00:00

 학점 관리 하랴, 스펙 쌓으랴, 아르바이트 하랴…. 삶에 지칠 대로 지친 대학생 장 씨는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넘어서야 일과를 마쳤다. 늘 그래왔는데 오늘따라 더 지치는 것은 기분 탓일까. 누군가 옆에서 힘이 돼 줬으면 싶지만, 친구에게 쉽사리 도움을 요청하기도 망설여진다. 다들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장 씨가 발걸음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서점. 작년에 베스트셀러였던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행복한 한 해를 보낸 뒤로, 그녀는 독서를 더욱 특별히 생각하게 됐다.
 서점을 둘러보던 그녀는 서점 풍경이 작년과는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년 내내 ‘욜로(YOLO)’를 권하던 책들은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불편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 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캐릭터와 예쁜 디자인이 눈길을 끄는 책도 있었다. 한쪽에는 SNS 작가들의 책을 모아놓은 진열장도 마련돼 있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에는 타인과의 관계를 다룬 책들이 한가득 놓여있기도 했다. 베스트셀러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호가 반영되기 마련인데, 올해에는 왜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일까? 

신념을 소비하다
 먼저, 2018년 상반기에 가장 ‘핫’했던 베스트셀러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주요 서점 네 곳에서 종합 1, 2위를 다투고 있는 책은 ‘상처받은 일을 그냥 넘기지 말라’는 내용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과 대한민국 여성의 삶을 그린 『82년생 김지영』이다. 을(乙)들의 목소리가 도서시장에 퍼진 것이다.
 올 상반기에는 재벌총수 일가의 일명 ‘갑(甲)질 논란’으로 사회적인 파장이 일었고, 1월 말에는 서지현 검사를 선두로 사회 각계각층에서 ‘미투(Me too) 운동’이 전개됐다. 이런 사건들을 겪으며 ‘더 이상 당하고 살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들이 소비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는 소비, 일명 ‘미닝아웃(Meaning out)’ 현상이 서점가에까지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책을 읽느냐가 ‘나’를 정의하는 세상. 이제 소비는 투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는 행위가 됐다.

▲여심 저격 캐릭터를 활용한 베스트셀러

여심을 저격하다 
 여심을 사로잡은 도서들도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점령했다. 그중에는 캐릭터를 활용해 교보문고 상반기 베스트셀러 종합 4위에 안착한 책도 있다. 바로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다. 이 도서는 ‘곰돌이 푸’ 캐릭터로 여성 독자들을 대거 유입했다. 베스트셀러 업무를 맡고 있는 김현정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 담당자는 이 책의 구매자 중 78.1%가 여성이라고 말했다. 
 잊을 만하면 소장욕구를 자극하는 예쁜 표지로 재출간해 여심을 잡은 책도 있다. 김 담당자는 “도서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는 기존에도 베스트셀러 30위권 내에서 오르내리던 책이지만, 리커버 에디션을 출간하면서 단숨에 상위권에 올랐다”고 전했다. 이른바 ‘매력자본’ 전략을 활용한 것이다. 상품 포화 시장에서 선택장애에 걸린 소비자에게 상품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매력’이 필수적이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이 이미 여러 개 있지만, 매력적인 신상 이모티콘이 나올 때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결제하는 본인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귀엽고 예쁜 책을 나도 모르게 집어 드는 것도 바로 이 ‘매력’에 이끌려서다. 

SNS, 날개를 달다 
 SNS는 문화 전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8년 상반기 도서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올 상반기에는 ‘SNS 작가’들이 SNS에 짧은 글을 올리고, 이를 엮어 발간한 책이 인기를 얻었다. 20~30대를 중심으로 ‘인스타그램’이 주요 SNS 채널로 각광받으면서 감성적인 사진과 글이 어우러진 콘텐츠가 인기를 끈 탓이다. 수십만 명의 팔로워를 지닌 하태완, 김지훈, 흔글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특히, 에세이 분야의 『모든 순간이 너였다』는 주요 서점 네 곳에서 종합 3위를 차지했다. 
 SNS 문학이 유행하자, 일각에서는 가벼운 콘텐츠를 소비하려는 경향이 높아졌다며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SNS가 없었으면 이러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리 없고, 시집이 주목을 받을 리도 없다. SNS는 오히려 독자를 유입해 쇠퇴하던 도서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나를 외치다 
 ‘퇴사하고 떠나라’는 식의 강경책을 제시하던 책들이 인기를 끌었던 것과 달리, 올 상반기에는 보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들이 주목을 받았다. 자존감을 높이는 삶의 방식을 담고 있는 책들이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는 거창한 변화를 요구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괜찮다며 독자를 위로한다. 
 한편, 관계 속에서 ‘나’를 잃어간 사람들은 ‘진짜 나’를 지키는 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신경 끄기의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다. 이 책은 타인과의 관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췄으며, 주요 서점 두 곳에서 종합 4위에 올랐다. 
 이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그만큼 한국사회에 개인주의적 성향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어서다. 개인이 원자화된 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타인이 아닌 ‘나’의 감정이기에, ‘인간관계에 적절한 거리두기’, ‘나에 집중하기’ 트렌드는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별 고민 없이 마음이 가는 대로 책을 집어 들었던 장 씨는 변화한 트렌드를 접하고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기호가 사회 트렌드에 반영된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래서 장 씨는 결심했다. 이리저리 흘러가는 트렌드 속에서 문화의 주체가 되기 위해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적극적으로 소비할 것이라고. 당신도 장 씨처럼 당신의 취향과 생각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다면, 그리고 거대한 트렌드 조성에 동참하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서점으로 향해보자. 트렌드세터(Trend setter)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장선아 기자
[email protected]

댓글 [ 0 ]
댓글 서비스는 로그인 이후 사용가능합니다.
댓글등록
취소
  • 최신순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