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길을 걷다 넘어진다. 넘어지면 신체는 필연적으로 지면과 충돌하고, 피부 조직이 찢겨지면서 홈이 파인다. 이 홈을 우리는 ‘상처’라고 말한다. 이때 상처 위로 옷이 닿거나 바람이 불면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상처 위에 딱지가 앉을 즈음이면 고통은 사라진다.
그런가하면 마음의 상처도 있다. 타인에게 비난받거나 무시당할 때 우리 마음은 쓰라린 상처를 입는다. 이는 물리적 상처와 같이 건들면 쓰리고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그러나 이것은 물리적 상처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쉽게 그 상처를 후벼 파곤 한다. 상처를 붕대로 감싸 맨 환자를 건들지 않는 것과는 정반대다.
지난 2014년,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이 사고로 300여 명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배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타고 있었고, 사망자의 대부분은 이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는 도리어 조롱하는 모습을 보여 빈축을 샀다. 심지어 단식 투쟁을 벌이는 유족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먹는 ‘폭식 투쟁’까지 감행했다. 유족들의 마음을 감싸주기는커녕 도리어 후벼 판 것이다.
지난 3월 뉴질랜드의 저신다 아던 총리가 보여준 행동은 위와 딴판이다. 그는 검은 히잡을 쓰고 총기 테러로 가족을 잃은 무슬림들을 포옹으로 위로했다. 마치 딱지가 상처를 덮어 아물 수 있도록 도와주듯 말이다.
이러한 일은 비단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아던 총리처럼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치 채지 못한 순간, 우리의 야트막한 이해와 몰상식은 우리의 말을 날카로운 칼바람으로 만들어 상대의 상처를 채찍처럼 휘갈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매서운 바람인가, 포근한 딱지인가?
윤희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