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광주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한성대신문, 556호)

    • 입력 2020-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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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0-05-25 13:50

시민이 계엄군을 앞에 두고 도청 광장에 운집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순간 군인이 시민을 향해 실탄을 발사한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고 수많은 시민이 죽고 다친다. 병원도 아수라장이 된다. 사람들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의사는 사람을 살려보려 애쓰지만 손쓸 새 없이 사망한다.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이다. 5·18 민주화운동은 고통스러웠지만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에 없어선 안됐을 중요한 사건이었다.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12·12 군사반란’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같은 날 국회봉쇄, 학생·정치인·재야인사 등 2,699명 구금, 정당· 정치활동 금지 등의 정치탄압이 자행됐다.

정부의 비정상적 행태에 5월 18~19일 광주 시민은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하지만 계엄군은 시민을 무차별 진압, 연행했다. 19일 최초 사망자가 발생했고, 첫 발포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부상을 입었다.

19일 시위현장에 있었던 양만승(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사무총장(당시 23세)은 오후 3시 40분경 계엄군 4명에게 곤봉으로 구타당했다. 양 사무총장은 “본인은 당시 코카콜라 영업직 보조로 근무했다. 회사 근무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계엄군이 본인을 학생으로 오인하고 구타했다”며 “학생이 아니라고 해도 신분을 위장하려고 근무복을 입고 다닌다며 계속해서 폭행했다”고 증언했다.

20일,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시위 규모는 더 커졌다. 도서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정해구 저)에선 “그간 계엄군의 잔혹함을 본 시민은 ‘저항하는 군중’이 아니라 사생결단을 각오한 ‘성난 민중’으로 변모했다”고 설명한다.

당일 시민은 광주 MBC 건물에 불을 놓았다. 언론이 계엄군의 만행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엄군은 광주 장악을 위해 작전명 ‘화려한 휴가’를 본격적으로 수행했다. 같은날 계엄군에 실탄이 지급됐다.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발포하면서 4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21일에는 시외전화가 두절됐다. 또한 상기의 이유로 광주 KBS 건물이 방화됐다. 오후 1시, 계엄군은 도청에서 애국가에 맞춰시민을 향해 집단 발포했다.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은 장갑차, 폭발물·총기등을 탈취·무장했으며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했다. 그날 계엄군은 도청에서 철수한뒤 조선대학교로 퇴각했다. 시민군은 계엄군이 철수한 도청을 점령했다.

22일부터 광주 시민들의 시민 자치가 이뤄졌다. 시민들은 수습대책위원회(이하 수습위)를 조직해 질서를 유지했다. 범죄 발생률은 평소보다 낮아졌고, 시내 금은방 및 은행의 금융사고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정일영(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는“계엄군이 철수한 뒤 시민은 자발적으로 일상을 되찾기 위해 ‘자치’를 실시했다. 비극속에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평했다.

수습위는 22일부터 계엄군과 협상을 시작했으나 계엄군은 무조건 무기 반납을 요구했다. 양일간 수습위는 무기 반납을 반대하는 강경파와 무기 반납 후 협상을 하자는온건파로 갈라졌다. 결국 25일 온건파는 도청을 빠져나갔고 강경파는 무기를 들고 도청에 남기로 했다.

계엄군은 26일 오후 6시까지 무조건 투항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하지만 시민군은 최후까지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27일, 계엄군이 전차를 끌고 광주 시내로 재진입했다. 결국 계엄군은 도청을 점령했고, 시민군을 무력 진압·연행했다. 이후 신군부는 모든사건의 발단이 폭동이라고 조작했다.

5·18 민주화운동 자체는 신군부의 유혈진압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국 민주화 역사의 한 축으로 작용했다. 최영태(전남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는 “사건 이후,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광주 시민들의 투쟁에 감명 받음과 동시에 강한 부채감을 느꼈다”며 “5·18 민주화운동은 실패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짐으로써, 5·18 민주화운동도 궁극적으로는 성공한 항쟁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5·18 민주화운동의 책임규명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 정 교수는 “공군 전폭기 출격 계획, 시민을 향한 헬기 사격 등 많은 사실이 밝혀졌지만, ‘책임’을 묻는 차원에선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도 사회적으로 보듬어지지 않았다. 가해자는 지금까지도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며 “그 속에서 피해자는 또 다른 가해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광주 시민이 목숨 걸고 투쟁하지 않았다면 한국 민주화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이다. 가해자들은 과연 진정한 반성을 보일 것인가? 언제쯤 오월 영령들을 기릴 날이 올 것인가?

김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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