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마법처럼 펼쳐지는 분자요리의 미학 (한성대신문, 605호)

    • 입력 2024-11-1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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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4-11-18 00:01
▲구체화기법을 활용한 디저트 [사진 제공 : 채현석 교수]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가 연신 화제를 모은 가운데, ‘분자요리’라는 조리 방식도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다. 분자요리는 익숙한 재료의 특성과 요리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맛과 질감을 새롭게 변형시키거나 전혀 다른 형태의 음식을 창조하는 독특한 요리 기법이다. 친숙한 재료에 어떤 과학이 곁들여져 새로운 맛이 탄생하는 것일까.

분자요리는 재료와 음식을 구성하는 분자를 물리·화학적 작용을 이용해 변형시키는 과학적 조리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주로 ▲구체화기법 ▲냉동기법 ▲진공 저온 조리법 등이 사용된다. 채현석(한국관광대학교 호텔조리과) 교수는 “스페인에서 처음 시작된 분자요리가 유명해지기 시작하며 다양한 분자요리 기법들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초장 캐비어를 올린 문어 요리 [사진 제공 : 채현석 교수]

낯선 구슬 속 익숙한 풍미

‘구체화기법’은 주스 등의 액체를 구 모양의 젤리 형태로 고체화시키는 기술이다. 캐비어(Caviar)와 같은 작은 알의 형태로 만들어지며 주로 파인다이닝(Finedining) 등 고급 요리에서 장식의 용도로 활용된다. 구체화기법을 활용하면 샐러드에 발사믹 식초를 뿌려먹는 대신 발사믹 식초를 캐비어 형태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최유진(용인대학교 식품조리학부) 교수는 “구체화기법은 오렌지 주스 등의 액체를 캐비어 형태로 만들고 이를 연어 요리 위에 곁들이는 방식”이라고 답했다.

액체를 구형으로 만들기 위해 식품첨가물인 ‘알긴산나트륨((C₆H₇O₆Na)n)’과 ‘염화칼슘(CaCl₂)’이 사용된다. 두 식품첨가물 모두 액체와 쉽게 결합하는 특성을 갖는다. 알긴산나트륨은 미역과 같은 해조류에서 추출된 천연 고분자 물질로, 분자량이 1만 이상에 달하는 거대한 화학 결합체다. 분자량이 크면 다른 화학반응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성질을 가져 물 등의 다른 분자와 쉽게 결합할 수 있다. 염화칼슘은 수분을 용이하게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며 수분과 만나면 서로 엉겨붙는 특성을 지닌다. 채 교수는 “독성이 낮아 생체 적합성이 뛰어난 알긴산나트륨은 천연 고분자 물질이고 염화칼슘은 해수에 소량 함유돼 있는 이온성 화합물”이라며 “두 물질 모두 다양한 형태로 요리에 이용된다”고 밝혔다.

먼저 구체로 맛을 내고자하는 주스, 소스 등 액체를 알긴산나트륨과 섞는다. 추가로 염화칼슘도 물에 녹여 수용액 형태로 만든다. 각각의 수용액은 안정한 상태를 이루기 위해 ‘이온화’한다. 이온화는 화학물질이 안정적인 상태를 찾기 위해 원자가 전자를 잃거나 얻어 양이온과 음이온으로 분리되는 현상이다. 이온화는 물 분자의 ‘극성’으로 인해 발생한다. 극성이란 음전하와 양전하가 모두 분포된 분자의 전기적 성질이다. 물 분자는 음전하를 갖는 수소 원자(H)와 양전하를 갖는 산소 원자(O)로 결합된 극성을 띤다. 이 같은 물의 특성은 다른 물질의 분자를 용이하게 분리시키며 이온화한다. 물이 다른 물질의 음전하를 띤 부분은 수소 원자로, 양전하를 띤 부분은 산소 원자 쪽으로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이에 알긴산나트륨은 양이온인 나트륨 이온(Na⁺)과 음이온의 전자를 갖는 알긴산((C₆H₈O₆)n) 분자로 분리되고, 염화칼슘은 양이온인 칼슘 이온(Ca⁲⁺)과 음이온인 염소 이온(CI⁻)으로 분해된다. 정진영(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알긴산나트륨과 염화칼슘이 수용액에서 이온화되며 물리화학적 작용이 시작된다”고 전했다.

분자가 이온화 과정을 거치면 화학적으로 더욱 안정적인 상태를 얻기 위해 양이온과 음이온이 서로 결합하는 ‘이온결합’이 일어난다. 음이온인 알긴산 분자는 양이온인 칼슘 이온과 결합하고 염소 분자는 나트륨 이온과 화합된다. 이온결합을 이루면 ‘알긴산칼슘((C₁₂H₁₄CaO₁₂)n)’과 ‘염화나트륨(NaCI)’의 안정적인 분자가 새롭게 형성된다. 정 책임연구원은 “알긴산나트륨과 염화칼슘이 이온화된 이후 칼슘 이온과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이 치환되는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했다.

새롭게 탄생한 알긴산칼슘은 물에 녹지 않는 막을 형성한다. 소금의 주성분인 염화나트륨은 여전히 물에 녹아 수용액으로 남아있다. 반면 알긴산칼슘은 칼슘 이온의 강한 결합력으로 인해 물에 녹지 않는다. 분자 사이를 강하게 연결하는 성질을 갖는 칼슘 이온이 알긴산 분자 사이를 끈끈하게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알긴산나트륨이 염화칼슘과 직접적으로 만난 외부에서만 막이 형성돼 내부에는 액체 상태를 유지하며 구형 젤리가 완성된다. 결과적으로 소금물과 동그란 젤리 형태의 캐비어가 남게 돼 이를 건져서 요리로 제공한다. 최 교수는 “구체화기법을 활용한 캐비어를 섭취하면 젤리 형태의 막을 뚫고 주스 등의 액체가 터져나오며 다른 식감과 미식 경험을 형성한다”고 답했다.

▲액화질소를 활용해 얼린 디저트 [사진 제공 : 컴포테이블]

영하 196도에서 피어난 고운 식감

분자요리의 조리방법 중 하나로 ‘냉동기법’도 자주 활용된다. 냉동기법은 영하 196도에서 액체 형태로 존재하는 액화질소를 활용해 재료를 급속 냉동시켜 조리하는 방식이다. 냉동기법은 냉동시키는 재료와 요리의 종류에 따라 결과물이 천차만별이다. 통상적으로 셔벗(Sherbet), 샐러드 등의 요리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채 교수는 “사케를 액화질소로 얼려 셔벗 형태의 디저트를 만들어 내는 등 다양한 요리에 활용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일반적으로 재료를 천천히 냉동시키는 과정에는 용액의 농도에 따라 분자가 이동하는 ‘삼투’ 현상이 나타난다. 냉동 과정에서 삼투 현상은 용액 내 순수한 물 분자만 얼음이 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삼투는 용액 속의 용질 입자는 이동하지 않고, 용질을 녹이는 물 등의 용매 입자가 저농도에서 고농도로 이동하며 나타난다. 이에 두 용액의 농도 차이는 줄어든다. 물과 당류가 섞여 있는 소스도 천천히 냉동될 때 먼저 얼기 시작한 부분은 순수한 물 분자만 고체가 되고 남아 있는 용액의 농도는 점차 높아진다. 남아 있는 물 분자가 당 등이 다량 녹아 있는 고농도로 이동하며 삼투 현상이 나타난다. 삼투 현상이 지속되면 기존 얼음 입자 위에 물 분자가 계속 쌓이면서 크고 단단한 얼음 결정이 생겨난다. 장세은(을지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동결이 천천히 진행되면 얼음 결정이 커져 육류 조직세포의 파괴도 늘어나게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액화질소를 활용한 냉동기법의 경우 삼투 현상이 중간에 차단되며 작고 고운 얼음 입자가 형성된다. 재료에 액화질소를 부어 냉동하는 과정에서 삼투 현상이 일부 진행되지만 이미 얼음이 생성된 부분으로 물 분자가 향하기 전에 모든 분자가 급속도로 얼어붙기 때문이다. 액체가 아닌 육류, 과채류 등에 냉동기법을 활용할 경우 재료를 구성하는 조직세포도 함께 냉동되며 세포를 구성하는 내부의 수분 또한 빠르게 동결된다. 세포의 구조가 손상되지 않고 수분이 보존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장 교수는 “냉동 시 동결이 빨리 이뤄지면 얼음 결정의 크기가 작게 형성돼 식품의 조직 파괴가 적어 새로운 식감을 선사함과 동시에 맛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전했다.

▲진공 저온 조리법을 활용한 스테이크 [사진 제공 : 컴포테이블]

온도와 시간이 빚어낸 단백질 변형

수비드라 불리는 ‘진공 저온 조리법’ 또한 분자요리에서 널리 사용되는 기법이다. 이 조리법은 고기나 생선 등의 재료를 진공으로 포장한 뒤 섭씨 60도 부근에서 재료를 장시간 가열하며 익히는 방식이다. 섭씨 65도를 초과한 온도에서 가열할 경우 육류의 근육 수축을 담당하는 세포 ‘액틴’이 변형되며 수축이 활성화돼 고기가 질겨지기 때문에 보다 낮은 온도에서 재료를 천천히 익힌다. 채 교수는 “진공 저온 조리법의 핵심은 육류 단백질 변성을 조절하는 데 있다”며 “특히 고온에서 가열하면 액틴이 수축해 질겨지므로 이를 최대한 늦추며 조리해야 한다”고 전했다.

진공 저온 조리법은 오랜 시간 식재료를 가열하는 과정에서 육류를 구성하는 단백질의 구조가 달라지는 ‘단백질 변성’ 원리가 적용된다. 단백질 변성은 열에 의해 단백질 결합 구조가 약화되고 단백질을 구성하는 분자의 성질이 변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채 교수는 “단백질의 구조는 1차부터 4차까지의 입체적인 구조로 구성돼 있다”며 “단백질 변성은 이 구조를 이루는 여러 가지 결합이 끊어져 분자 내 고유한 성질이 변화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단백질의 일종인 ‘콜라겐’은 물에 녹지 않는 성질을 가진 불용성 단백질이다. 콜라겐은 ‘아미노산’이라는 기본 단위로 구성돼 있는데 보다 단단한 근육을 형성하기 위해 여러 아미노산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견고한 단백질 구조를 형성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단백질 구조 사이를 연결하는 ‘수소결합’이 일어난다. 물이 체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물을 구성하는 수소 원자가 결합에 관여하는 것이다. 수소결합을 통해 단백질 구조는 안정성을 갖고 일정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며 콜라겐이 완성된다.

진공 저온 조리법을 활용하면 콜라겐이 분해되면서 젤라틴의 형태로 변한다. 열이 가해지면 콜라겐 형태를 유지시키는 수소결합이 끊어진다. 결합이 해체된 콜라겐은 단백질 구조의 안정성을 잃고 불용성 단백질에서 물에 잘 녹는 가용성 단백질로 변성된다. 가용성 콜라겐은 수소결합이 해체되면서 함께 방출된 물에 녹아 젤라틴이 된다. 즉 열에 의해 콜라겐이 녹아 젤라틴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장 교수는 “결합조직을 구성하는 불용성의 콜라겐은 물과 함께 장시간 가열하면 가용성인 젤라틴으로 변해 용출된다”고 설명했다.

흘러나온 수분과 젤라틴은 고기를 속까지 균일하게 익힌다. 진공상태에서 추출된 수분과 젤라틴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고 고기 조직 곳곳에 열을 전달해 속까지 고르게 익도록 돕기 때문이다. 수분이 빠져나가지 않아 고기는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을 유지할 수 있다. 장 교수는 “진공 저온 조리법을 활용하면 진공 상태 덕분에 수분과 젤라틴이 보존돼 고기의 겉과 속을 고르게 익히고 연한 식감과 풍미를 살릴 수 있다”고 밝혔다.

분자요리는 물리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과학 원리를 활용해 익숙한 재료를 활용해 새로운 맛과 질감 그리고 형태를 새롭게 창조시켜 오감을 자극하는 조리 방법으로 음식계의 주요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단순 요리의 형태를 넘어 예술적인 감각이 더해지며 혁신적인 조리 방식으로 평가받는다. 최 교수는 “새로운 맛과 식감을 내기 위한 분자요리의 응용은 소비자에게 새로운 맛과 식감의 미식 경험을 선사면서 국내 외식시장의 성장으로 이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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