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등장해 악당을 쳐부수고, 문제적 상황들을 깔끔하게 해결해내는 영화의 엔딩은 우리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현실에서도 복잡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끊어버릴 영웅을 찾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욕심이 때로 망령된 허상을 불러낸다.
최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고향에 세워진 그의 동상과 모형물에 대해 논란이 일파만파로 커졌다. 현존인물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지적이 계속 제기되었고, 워싱턴포스트지 기자는 기사에서 ‘반기문 우상화는 마치 북한을 연상시킨다’라고까지 언급했다. 결국 지자체가 동상을 철거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이후에도 정치적 문제가 얽히면서 후폭풍이 일었다. 동상 제작 목적이 지역홍보였는지 아니면 반 총장의 정치적 행보와 연관된 것인지에 대해 이견이 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동상 제작의 선결조건이 ‘우상을 좋아하는 대중들’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때때로 미화된 영웅이 ‘만들어’진다. 물론 난세에 영웅의 탄생을 바라는 것은 고릿적 시절부터 계속된 민초들의 몇 안되는 낙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단, 그 시대적 배경이 왕정·제정 혹은 파시즘이라는 전제 하에서.
반면 민주주의는 영웅 대신에 ‘나와 비슷한 우리’가 만들어가는 현실 세상에서의 ‘선택과 수용’,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한다. 버튼을 대신해 눌러줄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지 않고, 개인들이 스스로 서기를 요구하는 것이 민주주의인 셈이다. 그래서 더 이상 영웅을 바래서는 안된다. 영웅의 등장을 원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현실에는 드물어 찾을 수 없는 영웅을 만들어내기 위해 과장과 미화가 판을 칠 것이고, 결국에는 또다시 ‘동상’이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무수히 많은 ‘백마탄 초인’들의 몰락을 지켜봐왔다. 더 이상 민주주의 사회에서 영웅에게 내어줄 자리는 없다.
김민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