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세계는 곰들이 사는 지상세계와 쥐들이 사는 지하세계로 극명하게 갈려있다. 이 두 세계는 편견을 가지고 서로를 미워한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 비극이 펼쳐지고 있다. 주인공인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은 두 세계의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쥐 셀레스틴은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주변 쥐들은 그가 치과의사를 하도록 강요한다. 쥐의 세계에서는 치과 의사가 최고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곰의 이가 필요하다. 셀레스틴은 치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를 훔치기 위하여 곰의 세계로 올라가지만, 그 과정에서 곰에게 발각되고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한편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해 겨울잠에서 깬 어네스트는 구걸을 위해 도시로 나간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음악을 연주한다. 하지만 곰들은 그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네스트는 ‘공공질서 방해’로 벌금을 물게 된다. 배고픔을 해소하지 못한 어네스트는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셀레스틴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편견에 둘러싸여 상처받은 두 주인공은 서로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쥐와 곰이라는 종의 차이, 그리고 그들 사이를 가르는 편견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된다. 결국 셀레스틴은 어네스트의 편견어린 시선을 이기지 못해 지하로 내려가서 잠을 청한다. 잠에 든 셀레스틴은 깊은 악몽을 꾸며 발버둥친다.
이 소리를 들은 어네스트는 셀레스틴을 달래며 연민을 느낀다. 잠에서 깬 셀레스틴은 울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한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자신을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 둘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아픔을 공유 한다. 그리고 그 아픔이 같은 것임을 느끼며 서로를 감싸준다.
영화는 두 주인공의 갈등이 해결되는 이 장면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셀레스틴이 악몽을 꾸는 장면에서는 어둡기만 했던 배경이, 어네스트가 셀레스틴을 달래는 장면에서는 따뜻한 느낌의 갈색으로 바뀌면서 시각적인 감동을 준다.
항상 편견과 아픔이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무겁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 무거운 주제를 아름다운 영상으로 잘 감싸고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편견과 아픔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서로의 온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유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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