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건국신화’를 자세히 배워 본 적 있는가. 혹자는 역사는 본질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하므로 역사 과목에 허구의 이야기인 신화를 포함시킬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건국신화에는 그것이 만들어질 당시 대중의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이에 대해 서영대(인하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는 “건국신화는 과거 사실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익숙하고, 널리 알려진 건국신화는 단군신화다. 역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 과정이나 당대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임재해(국립안동대학교 민속학과) 명예교수는 이를 “고대 국가의 건국사는 모두 신화로 서술돼 있기 때문에 건국신화는 국가의 시작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단군신화를 서술하고 있는 서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유사』다. 『삼국유사』 속 단군신화는 하늘신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 뜻(홍익인간)을 품고,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이후 ‘신시(神市)’라는 집단을 만들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 360여 가지의 인간사를 주관한다.
그때에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원하며 환웅을 찾아갔다. 환웅은 이들에게 100일간 쑥과 마늘만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라 일러준다.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곰은 쑥과 마늘만을 먹으며 여자가 되는 데 성공하는데, 그가 바로 ‘웅녀’다. 이후 웅녀는 환웅과 혼인해 단군을 낳는다. 단군은 고조선을 세우고 1,500년간 통치한다. 이후 단군은 산신으로 승천하고 신화는 끝이 난다.
단군신화 속 여러 등장인물에 대해 자세히 뜯어보면 많은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다. 환웅은 하늘신을 대신해 지상으로 내려오고, ‘신시’라는 자신만의 집단을 만들어 지도자로 군림한다. 하늘신의 대리자로서 사람의 땅에 내려와 집단을 만드는 일은 건국신화 속 건국자의 주요한 특징이다. 환웅에게 이같은 건국자적 면모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가 단순히 단군의 아버지로만 상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웅 또한 단군처럼 신시의 건국자인 것이다. 동아시아의 다른 여러 건국신화에서 건국자의 아버지에 대해 잘 언급하지 않는 것과 달리 단군신화에서는 환웅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임 교수는 “신시라는 국호가 명시돼 있고, 환웅이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까지 지닌 것을 통해 그도 건국시조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환웅은 또한 자연세계와 교감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졌다. 그는 360여 가지의 인간사 중 곡식·수명·질병을 직접 주관했다. 곡식과 수명 같은 개념은 고대에 사람의 일이 아닌 자연세계의 일로 이해됐다. 자연세계와의 교감 능력은 지도자로서 환웅에게 정당성과 권력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조원진(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연구교수는 “환웅이 자연세계의 일까지 주관한 것은 그가 세속적 권위에 더해 초월적 영역과 통할 수 있는 종교적 권능을 갖춘 권력자임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또한 단군신화에서는 토테미즘적 요소도 찾아볼 수 있는데, 토테미즘이란 특정한 자연물과 집단이 혈연관계 등의 특수한 관계에 있다는 믿음이다. 곰과 호랑이를 이러한 자연물의 흔적으로 본다면, 곰과 호랑이를 조상으로 삼는 집단이 각각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학교 융합고고학과) 교수는 “고조선을 구성했던 하나의 부족으로 이해되는 예족(濊族)의 여러 풍습 중 호랑이를 숭배하는 의식이 있었고, 이것이 호랑이 토템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라고 말했다. 이어 “신석기 시대 이래로 시베리아와 만주 지역에서 곰 숭배 신앙이 보편화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토테미즘을 중심으로 곰에 대한 내용을 해석한다면, 웅녀는 곰을 숭배하는 집단의 대표이고, 환웅과 웅녀의 혼인은 환웅의 신시 집단과 ‘웅녀 집단’의 결합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집단 간의 통합과 확장이 이루어졌고, 단군은 확대된 큰 집단의 지도자로 등장한 것이다. 조 교수는 “『삼국유사』 등에서 환웅과 웅녀의 혼인 이후에 단군의 개국이 서술되고 있는 것은 환웅의 신시 집단과 웅녀 집단이 통합해 단군의 집단으로 새롭게 재편되고, 확장된 세력을 기반으로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견해의 근거”라고 이야기했다.
역사가들은 신화는 상징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단군신화를 만든 측은 신비로운 이야기를 통해 고조선 왕권의 강화를 이루려 했다. 이정빈(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신화 속 단군의 부계가 하늘신인 것은 고조선 왕의 권위와 통치 정당성을 설명한다. 단군신화는 왕권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