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정> 3·1운동 104주년을 맞아 (한성대신문, 586호)

    • 입력 2023-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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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3-02-26 21:48

이번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4주년이 된다. 3·1운동은 기독교·천도교·불교의 주도로 시작되었지만 남녀와 노소, 신분과 계층, 종교와 사상의 구별 없이 거의 전 민족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3·1운동 후 우리 민족은 상해에서 임시정부,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 국내에서 한성정부를 수립하고, 1919년 9월 이 셋을 합하여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3·1운동 후, 우리 민족은 ‘독립’ 혹은 ‘민족해방’을 위해 대동단결과 민족통합을 수없이 목이 터지게 외쳤지만, 지역·종교·계층·사상·이념의 대립과 갈등으로 단결과 통합의 꿈은 실현하지 못하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동족상잔으로 인해 남과 북이 두 체제의 국가로 분열되었고, 현재의 대한민국도 지역·계층과 정견·이념의 차이로 첨예하게 대립·투쟁하기도 한다.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우, 1920년 초부터 이승만의 위임통치론 주장과 외교운동론으로 북경 등지의 제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 원인이 독립운동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사실은 계층 간의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시 임시정부를 새롭게 연해주 등지에 수립하자고 주장한 창조파는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국호를 ‘대한민국’에서 ‘한국’으로 변경하였다. “국가라는 것은 백성(民)만의 나라가 아니다.”라는 왕실세력과 사족세력의 ‘대한민국’ 국호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인 대통령 이승만(감리교), 국무총리 이동휘(감리교), 노동국 총판 안창호(장로교)가 물러나고,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과 국무령에 선임된 인물이 유학자와 양반지배세력 출신인 백암 박은식과 석주 이상룡이었다는 점도 계층 간 갈등의 또 다른 증거다.

1920년대 국내에서는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대립하였다. 자유주의 세력은 미국과 일본 등과 해양 세력과 관계를 맺고 자본주의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반면에 사회주의 세력은 대륙 세력인 소비에트 러시아 등과 관계를 맺고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이 두 세력은 각기 다른 정치사회관을 조화롭게 수정하려는 노력보다, 각기 자신의 가치관에 입각한 민족통합을 추구하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한쪽을 친일파·반민족주의자 또는 국제주의자·비민족주의자로 공격하며 배제하였다.

우리 대학생은 한국인과 한민족의 지도자이다. 좋건 싫건 앞으로의 국민통합, 남북통일, 민족화합은 대학을 졸업한 여러분이 이루어야 할 숭고한 사명이다. 국민통합과 민족통합이란 구호만 외치며 권력과 이익을 독점하려 한 선생(先生)과 달리, 여러분은 구성원이 화합하고 단합할 수 있는 기준과 조건을 만들어가는 가외(可畏)의 후생(後生)이 되길 기대해본다.

조규태(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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