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한양 수도성곽, 세계로의 발돋움 (한성대신문, 589호)

    • 입력 2023-05-08 00:00
    • |
    • 수정 2023-05-10 14:27

상상관 12층 옥상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하 세계유산)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떠한가. 4월 13일 문화재청이 ‘한양의 수도성곽(이하 한양 수도성곽)’을 세계유산 ‘등재신청 후보’로 선정했다. 올해 9월 문화재청이 유네스코에 예비평가*신청서를 제출하면, 한양 수도성곽은 1년간의 예비평가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세계유산으로서의 한양 수도성곽

한양도성,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아우르는 한양 수도성곽은 2021년부터 하나의 유산으로서 세계유산 등재에 도전해 왔다. 한양도성의 경우 2012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라 2016년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했으나, 2017년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사전심사에서 ‘등재불가’ 판정을 받으며 불가피하게 등재신청을 철회했다. 또한 북한산성은 2018년 잠정목록에 오르는 것에 실패한 바 있다. 기호철(문화유산연구소 길) 소장은 “초창기부터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묶어 세계유산 등재를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면서도 “시간이 걸렸지만 현재는 ‘도성 방어체계’라는 제대로 된 등재 방향성이 설정됐다”고 술회했다.

어떠한 유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지녀야 한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란 국경을 초월할 만큼 독보적이며 현재 및 미래 세대의 전 인류에게 공통으로 중요한 문화 및 자연적 중요성을 의미한다. 이에 유네스코가 10가지 가치 평가 기준을 제시했는데, 문화유산인 한양 수도성곽은Ⅰ~Ⅵ 중 하나 이상을 반드시 만족해야 한다. 이외에도 ▲재질, 기법 등에서 원래 가치를 보유하는 ‘진정성(Authenticity)’ ▲유산의 가치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제반 요소를 보유하는 ‘완전성(Integrity)’ ▲법적, 행정적 보호 제도, 완충지역 설정 등 ‘보호 및 관리체계’가 포함돼야 한다. 과연 한양 수도성곽은 위의 기준들을 충족할까.

현재 한양 수도성곽은 등재기준 중 Ⅲ(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과 IV(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에 맞춰 등재를 준비 중이다. 송양섭(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는 “한양 수도성곽은 산지의 계곡과 능선 및 수계를 포괄하는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성곽으로 건설됐다는 점에서 등재기준 Ⅲ을 충족한다”고 말했다. 이어 “세 성곽은 평시의 평지성(平地成)과 전시의 산성을 통합한 한반도 수도성곽의 최종 발전 단계로서 등재기준 Ⅳ도 만족한다”고 첨언했다.

또한 진정성과 완전성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보호 및 관리 체계’도 추가될 예정이다. 기 소장은 “한양도성에 북한산성, 탕춘대성까지 포함하면 재질, 기법 등에서 원래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세 성곽이 도성 방어체계를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그 제반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영수(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행정구역이 나눠진 만큼 통합관리 체계를 구축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한양 수도성곽의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김 연구교수는 “지금의 단계까지 왔다는 것은 한양 수도성곽이 그만큼 가치 있다는 증거”라고 전했다. 이어 송 교수는 “한양 수도성곽은 여러 측면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또한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자양분으로 삼아 실무진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머지않아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종로구 창의문에서 북악(백악)산을 지나 혜화문에 이르는 한양도성의 백악구간 [사진 출처 : 서울관광 아카이브]

한양을 지켜낸 굳건한 방어체계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를 둘러싼 성곽이다. 이러한 도성(都城)은 조선의 도읍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궁궐과 백성들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축조됐다. 서울의 사산(四山)인 ▲낙산 ▲남산 ▲북악산 ▲인왕산을 연결하는 만큼 그 길이는 약 18.6km에 달한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훼손과 복원이 반복돼 현재는 13.1km가량의 구간만 남아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건국 약 2년 후인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종묘가 먼저 지어졌으며, 한양도성의 축조는 1396년에 1차와 2차로 나눠 진행됐다. 각각 49일이 소요된 공사에는 총 20만 명의 백성이 동원됐다. 성곽을 쌓으며 도성을 드나들 수 있도록 사대문과 사소문을 설치했다. 사대문은 유교의 네 가지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이름에 담아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라고 명명됐다. 이 사대문 사이에 나 있던 사소문은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다.

건설된 이후에도 한양도성은 여러 차례 보강이 이뤄졌다. 당초 한양도성의 평지 구간은 토(土)성, 산지와 구릉 구간은 석(石)성으로 지어졌는데, 세종 때 평지도 석성으로 수축됐다. 숙종 시절에는 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 등으로 구성된 삼군영(三軍營)이 한양도성의 대규모 개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김 연구교수는 “태조 때는 규격화 되지 않은 막돌을 사용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방형의 돌을 사용하고, 규격화된 돌의 크기도 커지는 등 축성술이 발달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도성이 당시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존재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한양과 지방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던 한양도성 성문의 개폐시간에 따라 이동했으며, 죽으면 누구나 성 밖으로 나가야 했다. 권기중(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는 “도성은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사람들의 유기적 생활공간이었다. 국가의 수도를 보호하는 군사적 기능과 더불어 도성민의 삶과 연계되며 생성된 중층적 가치를 지녔다”고 덧붙였다.

▲북한산의 지형에 맞춰 지어진 북한산성의 성곽. 남아있는 북한산성 중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일부분 [사진 출처 : 서울시 사진기록화사업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북한산성은 도성의 함락에 대비해 만들어졌기에 유사시 도성민 모두가 이동해 방어할 수 있는 입보성(入保城)으로 지어졌다. 산성이 자리한 북한산은 서울 근교의 산 가운데 가장 높고 산세가 웅장하다는 특징을 가졌다. 최주희(덕성여자대학교 사학전공) 교수는 “한양도성과 지리적으로 맞닿아 도성민이 피난할 입보처로 기획됐다”며 “국내에서 가장 난도가 높은 지역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산성은 조선의 19대 임금인 숙종 시절에 지어졌다. 왕과 조정의 피난처를 ‘보장처(保障處)’라 하는데, 조선의 보장처는 남한산성과 강화도 등이라 강을 건너야 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갔던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거나, 서해에 해적이 출현하는 등 지속적으로 곤욕을 치러 왔다. 이에 숙종은 험준한 지형의 북한산에 산성을 축성하기로 한다. 김우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정연구원은 “남한산성과 강화도 등은 보장처로서 강을 건너야 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북한산은 강을 건널 필요도 없고, 도성과 가까운 험지로 적절한 피신 장소”라고 말했다.

전쟁에 대비한 시설이었던 만큼 북한산성은 내부에 다양한 시설을 갖추도록 설계됐다. 왕이 머물면서 지휘소 역할을 하는 ‘행궁’을 비롯해 군량미를 저장할 수 있는 140여 칸의 창고와 승영사찰, 우물 등이 마련됐다. 송 교수는 “유사시를 대비해 북한산성 내부에는 다양한 군사시설이 마련돼 보장처로서 명실상부한 기능을 갖출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북한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활용해 고도의 기술력으로 지어진 산성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황인규(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북한산성은 북한산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 맞춰가며 다양한 축성법을 사용해 불과 6개월 만에 완성한 17세기 최고의 단일 군사 유산이다. 방어시설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라고 밝혔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홍지문의 전경. 도성 북쪽에 자리해 한북문으로 불리기도 한 탕춘대성의 성문 [사진 출처 : 서울시 사진기록화사업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지어진 성이다. 홍제천 일대의 탕춘대(蕩春臺)가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적의 통로를 차단할 수 있는 주요한 기능을 더했다. 더불어 군량과 무기 등을 비축하는 창성(倉城)의 역할도 수행했다. 기 소장은 “탕춘대성의 남쪽은 한양도성, 북쪽은 북한산성과 맞닿아 서쪽에만 성곽이 존재한다. 동쪽은 지형이 험준해 적이 넘어올 수 있는 곳만 토성을 쌓았다”며 “탕춘대 일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북한산성은 고립돼 지원받을 수 없는 한계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탕춘대성은 본래 북한산성이 완공된 후 착공됐으나, 반대 여론으로 축성이 중단됐다. 이후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겪으며 수도 방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탕춘대성과 ‘홍지문’을 완성한다. 경기 지역의 군무를 맡던 기관인 ‘총융청’을 탕춘대성 안으로 이전하고 군량 창고인 ‘평창’ 등도 뒀다. 영조는 백성과 함께 도성을 사수한다는 내용의 『수성윤음』도 반포했다. 이름 역시 ‘군사력을 단련한다’는 뜻을 담아 ‘연융대성(鍊戎臺城)’으로 변경했으나, 연산군 때부터 이어진 탕춘대의 역사가 깊은 만큼 사람들에게 익숙한 탕춘대성이 여전히 쓰이고 있다. 최 교수는 “산성의 길이 좁고 가팔라 곡식을 옮기기 어려워 탕춘대에 성을 짓게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탕춘대성이 도성 방어시스템의 핵심이었다는 평가를 내린다. 탕춘대성이 건립되면서 하나의 방어체계가 완성됐다는 설명이다. 김 정연구원은 “탕춘대성은 북한산성의 외성으로,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 취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북한산성과 더불어 탕춘대성은 숙종의 수도권 방어정책과 영조의 도성사수론의 주요한 토대를 이뤘다”고 전했다.

*예비평가 : 등재신청 준비 초기 단계부터 자문기구와 당사국 간의 논의를 통해 고품질의 등재신청서 준비 및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될 가능성을 높이고자 유네스코에서 도입한 제도

김기현 기자

[email protected]

댓글 [ 0 ]
댓글 서비스는 로그인 이후 사용가능합니다.
댓글등록
취소
  • 최신순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