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법의 어제와 오늘> 소비자에게 과중된 입증 부담, 제조물 책임법 (한성대신문, 600호)

    • 입력 2024-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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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4-05-13 00:00

경상남도 함안군의 한 도로에서 지난달 24일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했다. 60대 운전자가 자신의 손녀를 태운 SUV 차량을 몰던 도중 속도가 급격히 상승해 차량이 전복됐다. 운전자는 브레이크를 밟았음에도 차가 멈추지 않았다며 차량의 급발진을 주장했고 이에 경찰이 수사에 나선 상황이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허영(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연도별 국내 급발진 의심 차량 신고 현황(2010년~2022년)」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22년까지 급발진 의심으로 신고된 차량 766건 중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단 1건도 없다. 이번 사고 역시 차량의 급발진이 원인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이어진다. 때문에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임을 소비자가 직접 입증해야 하는 조항이 규정된 『제조물 책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의견이 속출하고 있다.

『제조물 책임법』은 제조물의 결함으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들을 보호하고자 만들어졌다. 제조업자의 고의나 과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제조물의 결함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제조업자가 지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제조물 결함으로 피해가 발생했다면 소비자가 직접 제조물의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제조업자에게 그 책임을 지게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조물 책임법』이 제정되기 전, 제조물 결함 등으로 인한 책임 주체에 대한 논의가 유럽에서 처음 이뤄졌다. 1985년 유럽연합에서『 제조물책임지침』을 통과시킨 후 해당 지침에 입각해 일본에서도 유사한 기능을 하는 법률이 1994년에 공포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서 해당 법률이 제정된 이후 본격적으로 『제조물 책임법』 도입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이후로 2000년 1월 12일『 제조물 책임법』이 제정됐고 2002년 7월 1일 시행됐다.

하지만『 제조물 책임법』을 통해 제조업자에게 피해 책임을 묻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제조물 책임법』 제3조의2에 따르면 제조물의 결함으로 입은 피해는 소비자가 직접 입증해야 한다. 소비자가 직접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입은 손해라는 점 ▲소비자가 아닌 제조업자의 잘못으로 발생한 손해라는 점 ▲제조물의 결함이 아니었다면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모두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각종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등 제조물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소비자 개인이 제조물 결함으로 인한 손해 발생을 직접 입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하종선(법률사무소 나루) 변호사는 “소비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제품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정도가 너무 높아 법원에서 쉽게 제조물 결함을 인정하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병록(서원대학교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제조물의 기술과 관련된 정보가 극히 부족한 소비자가 직접 제조물 결함을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제조사가 제조물 관련 자료를 소비자에게 제공할 의무가 『제조물 책임법』에 명시되지 않은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제조물의 결함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제조물 관련 자료 확보가 필수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조사들이 영업비밀 등의 이유로 관련 자료를 제공하지 않아 소비자가 증거를 확보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 제조물 책임법』에 따르면 제조사가 소비자에게 제조물 관련 자료를 제공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오학준(법무법인 법승) 변호사는 “제조물 결함을 입증할 증거 확보부터 쉽지 않다”고 전했다. 또한 하 변호사는 “제조업자가 제조물 관련 자료를 제공할 의무가 없기에 제조물 책임 관련 소송 재판에서 제조업자로부터 제조물의 설계도면 1장조차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제조물 책임법』 제3조의2에 대한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제조물 책임법』 제3조의2 제2호에 규정된 ‘손해가 제조업자의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부터 초래됐다는 사실’, 즉 제조업자의 잘못으로 발생한 손해라는 것을 입증하는 조항을 아예 삭제해 소비자의 입증 부담을 더는 방안이 주로 제기된다. 하 변호사는 “해당 조항은 소비자에게 너무 엄격한 기준이기에 삭제하는 것이 좋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제조사가 제조물 관련 자료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제조물 책임법』에 관련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고도 지적한다. 재판 전 당사자 간에 관련 증거를 미리 교환하는 제도로 미국에서 도입된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를『 제조물 책임법』에도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주일(상명대학교 글로벌경영학과) 교수는 “급발진 의심사고에서만큼은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돼 소비자가 쉽게 증거를 확보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하 변호사는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며 “문서 자료 제출 및 증언 녹화 등의 증거물을 제조사가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을『 제조물 책임법』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황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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