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자의 외교 노트> 원유의 방주, 한국에 정박하다 (한성대신문, 622호)

    • 입력 2026-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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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6-05-11 00:00

원유가 나오지 않는 한국이 원유 안전지대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중동 정세 불안으로 안정적인 저장·관리 능력이 대두되며 한국이 에너지 거점으로 도약할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미국-이란 전쟁 이후 원유 저장 능력이 새로운 에너지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약 5개월간 원유 수송의 핵심 경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수출 경로 봉쇄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원유의 안정적 확보가 에너지 안보 핵심 요소로 떠오른 것이다. 이충배(중앙대학교 국제물류학과) 교수는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 3월 회원국에 원유 순수입량 기준 최소 90일분의 비축유 확보를 권고했다”고 덧붙였다.
뜻밖에도 전 세계가 한국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UAE 등의 중동 산유국이 자국의 원유를 한국 영토 내에 보관하는 국제 공동 비축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세계 최대 산유국 중 하나인 UAE의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국영석유사(ADNOC)’와 계약 체결을 통해 한국은 비상용 에너지 약 2,400만 배럴(약 38억L)의 원유를 확보하고 우선 구매권까지 손에 넣었다.
한국에서도 에너지 거점이라는 지위를 굳히기 위해 더 많은 원유를 보관할 준비에 들어갔다. 한국 정부는 26조 원 규모 추가경정예산 편성 과정에서 비축유 관리 강화를 위한 1,908억 원 추가 투자를 발표했다. 이미 1억 4,600만 배럴(약 232억L) 규모의 원유에 추가로 약 2,000만 배럴(약 32억L)을 얹겠다는 구상이다. 이충배 교수는 “정부의 투자 확대는 한국을 국제 원유 저장고로 육성하려는 전략”이라고 답했다.
중동산 원유가 한국으로 향하는 이유에는 한국의 강력한 저장·가공 시설이 있다. 원유를 휘발유, 경유 등으로 바꾸는 정유·석유화학 시설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세계 6위 수준의 비축 역량과 하루 약 300만 배럴을 처리 가능한 정유·석유화학 시설을 갖췄다. 이러한 환경에서 원유의 품질 유지와 혼합·재가공·재공급까지 할 수 있는 체계가 이미 구축됐다. 공급망 위기 시 한국의 원유 저장고는 창고가 아니라 시발점으로 바뀌는 셈이다. 고보민(인천대학교 GTS학부) 교수는 “한국은 정유·석유화학 산업과의 높은 연계성을 바탕으로 비축된 원유를 신속히 가공·재공급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고 전했다.
여기에 비축유를 실제 공급망에 즉시 연결할 수 있는 운용 체계 역시 한국의 강점으로 꼽힌다. 한국은 해외 공동 비축, 정유사 등 민간 기업과 연계한 협력형 비축 체계를 가졌다. 또한 여러 거점에 분산하는 네트워크형 비축 등을 통해 단일 저장 방식의 한계를 보완해 왔다. 이는 비축유가 필요할 경우 신속하게 활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고 교수는 “한국은 정유·석유화학 산업과의 연계성이 높아 비축 자산이 실제 공급망 안정으로 전환되는 속도가 빠르다”고 말했다.
해상 물류의 흐름을 쥐락펴락하는 지점인 이른바 ‘초크 포인트(Choke-Point)’에서 한 발 비켜나 있다는 점도 한국의 경쟁력이다. 초크 포인트란 길목이 좁아 해상 통행이 제한적인 곳으로, 사고나 분쟁이 발생할 경우 전체 물류 흐름이 연쇄적으로 막히는 지점이다. 이는 대개 중동과 동남아 해역에 집중돼 있으나 한국은 해당 구간의 영향을 훨씬 덜 받는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은 항만 접근성이 뛰어나 중동 주요 수송로와 지리적으로 거리를 둔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안영효(인천대학교 GTS학부) 교수는 “과거에는 한국이 중동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 한계였으나 현재는 오히려 가장 큰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한국은 동북아 경쟁국과 비교해 외교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에서도 우위를 확보한다. 중국은 한국에 비해 국가의 정책 개입이 강해 안정성이 낮은 편이다. 또한 한국은 일본보다 중동 산유국들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산유국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대외 경제 협력 기조와 계약 이행의 연속성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신뢰를 얻고 있다. 이충배 교수는 “한국은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고 신뢰성이 높게 평가된다”고 말했다.
한국은 비축 물량의 유연한 전환을 통해 국내 유가 급등을 억제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국이 평소에는 원유를 사고파는 거래로 수익을 내다가도 필요할 경우 원유를 국내용으로 돌려 기름값 폭등을 막을 수 있다. 한국의 운용 역량이 공급 차질 국면에서 가격 상승 압력을 완화하는 완충 장치이자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축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고 교수는 “미국, 한국 등은 비축유를 시장에 방출하며 유가 급등에 대응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나아가 비축기지를 중심으로 정유·석유화학·해운 산업이 맞물리며 에너지 산업 전반이 안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원유의 저장과 가공, 운송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공급망 전반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글로벌인포메이션(IMARC)에 따르면 한국 석유 시장은 2024년 약 5,070억 원에서 약 1조 7,420억 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안 교수는 “항만 등 연관 산업이 성장해 물류 중심지로 도약할 기회”라고 전망했다.

임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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