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에 올라> 섬광 (한성대신문, 609호)

    • 입력 2025-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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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5-03-24 00:00

사회적 지위가 꽤나 있는 사람의 강연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푸짐한 풍채에 명품 같은 수트를 빼입고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강연에서는 본인의 업적을 나열한 강연자료, 신빙성없는 연구나 기사를 가져와 횡설수설 식은 땀 흘리는 것을 보며 인내심을 얻고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아까워 불쾌함마저 느꼈습니다. 그 강연실에 뭐라도 얻어가려 앉아 있는 사람들과 그 강연을 준비해준 사람들. 어림잡아 70명은 되는 인간들. 강연자가 그 사람들의 노고와 시간을 살 수 있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그 후 며칠 뒤에 소설로 상을 수상했다던 한 작가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듣는 사람만 200명이 넘는 규모에 강연장 또한 그에 맞춰 거대했습니다. 작은 체격의 작가는 평소 입고 다니는 듯한 단정한 복장에 별다른 자료 없이 그냥, 차분히 본인의 삶을 읆조렸습니다. 무대 위 한 명의 작은 인간이 혼자 우뚝서서 거대한 강연장을 한순간에 가득 채우고, 강연이 끝난 뒤에도 그 인간의 목소리가 내었던 에너지가 잔존해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은 동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매직이 지워지지 않을만한 소중한 물건에 그 작가의 싸인을 받았고, 그 순간은 지금도 아끼는 추억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는 새로운 꿈을 얻어 가기도 했습니다. 능력 좋다던 인간과 그 작가의 차이점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과거의 찰나였던 빛을 지키려는 불안한 이와, 찰나였던 빛은 어느새 거두어 마음 한 켠에 꽂아두고 더 밝은 빛을 좇는 이. 후자의 인간이 읊조리는 한 마디의 에너지가 월등하게 커서, 지루할 틈 없이 매료되었던 것입니다. 그 차이점을 생각하며 크게 느낀 점을 이 글을 읽게 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과분한 자리에 올라있는 사람은 매사에 불안할 것이고, 부족한 자리에 잠시 머무는 사람은 매사에 당찰 것입니다. 틀린 반은 스스로 메우고 각자의 시작점에서 최선을 다 해주세요. 당신의 가치를 죽는모양이 아닌 살아가는 모양에 부여해주세요.

허필건(사회과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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