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이야기> 선잠단지를 아시나요? (한성대신문, 520호)

    • 입력 2017-03-06 14:38

최근 성북동에서 선잠단지가 발굴되었다. 소문만 무성했던 선잠단의 원터가 확인된 것이다. 오랜만에 시내에서 중요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에 학계는 물론 성북구도 들떠있다. 그렇다면 선잠단지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선잠단지는 선잠제를 지내는 선잠단이 있는 공간이다. 선잠제는 조선시대 국가제례였으며 제사의 주제자는 본래 왕이지만 송나라의 제도를 따라 관원이 대신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선잠제를 지내는 시기는 대개 음력 3월을 넘기지 않았다.
인류 최초로 양잠을 한 사람은 중국의 황비였던 서릉씨로 알려져 있다. 설화에 따르면, 어느 날 서릉씨가 차를 마시다 실수로 누에고치를 뜨거운 찻잔에 빠트렸다. 그러자 고치에서 가느다란 실이 계속 풀어져 나왔다. 그때부터 서릉씨는 양잠의 이치를 알게 되었다. 서릉씨가 양잠을 시작하자 백성들도 뒤따라 하였고 비단실을 얻어 비단옷을 지어 입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양잠의 유래이고 서릉씨를 기리는 제사인 선잠제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잠은 고대부터 경제의 근간이었으며 여성들은 길쌈을 하며 인류의 의()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먹고 입는 것은 인간으로서 체면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길쌈은 매우 중요한 산업이었다. 태조실록에 농업과 양잠은 의식(衣食)의 근원이고 백성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조대의 언해잠서가 현전되지는 않지만 당시에 언문으로 번역하라고 명했던 만큼 양잠의 생산 주체가 여성임을 의식하고 여성의 독려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선잠제를 통해 알 수 있는 양잠의 내막을 생각해보았을 때, 여성들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주요한 생산 주체로서 사회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친잠(親蠶)’이라 하여 왕비가 몸소 누에를 침으로써 백성들에게 양잠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백성들이 조금 더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여 윤택하게 살기를 바라는 의미였다. 양잠은 이와 같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성행했다. 국영잠실이 설치되어 있던 잠실동이나 뽕밭이 많아 양잠이 성행했던 잠원동의 지명이 그 번영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들이다.
하지만 선잠단지는 정작 잠실동이나 잠원동이 아닌 성북동에 위치하고 있다. 선잠단지는 왜 하필 양잠과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성북동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을까. 선잠단지가 세종실록에는 동교(東郊), 성종실록에는 북교(北郊)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에서는 이를 북쪽은 순음(純陰)이라 하는데, 순수한 음기가 있는 방향과 비단실을 의미한다. 또한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방향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이유로 조선시대 선잠단은 동소문인 혜화문 밖에 설치되었고, 정확하게 말하면 북동쪽인 현재의 성북동에 위치하게 되었다.
 
 

▲ 이번에 발굴된 선잠단지 원터 유적의 모습을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박원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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