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내일의 동력이 되는 한 방울의 흐름 (한성대신문, 622호)

    • 입력 2026-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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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6-05-11 00:00

리터당 2,050원. 지난 4월 기준 국내 평균 휘발유 가격이다. 이는 전년 동월 대비 약 21% 상승한 수치를 보여준다. 최근 미국-이란 전쟁의 여파로 국제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되자 전 세계는 유가 안정화 전략 마련에 혈안이다. 이러한 가운데 원유를 정제하는 기술이 에너지 가격 변동에 대응하는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모든 석유 제품의 출발점인 원유는 지하에서 채굴해 아직 가공되지 않은 액체 상태의 에너지원을 일컫는다. 원유는 공기가 없는 환경에서 미세한 해양 유기물이 분해되며 형성되므로 탄화수소, 염화나트륨, 황, 질소 등 여러 불순물이 혼재돼 있다. 이를 가공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석유 에너지가 된다. 김병준(한국폴리텍대학교 석유화학공정과) 교수는 “여러 성분이 뒤섞인 원유를 우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서는 각 성분의 미세한 물리적 특성 차이를 정교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순물이 포함된 원유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정제 공정을 거쳐야 한다. 이는 크게 ▲탈염 ▲증류 ▲정제 ▲블렌딩 등의 과정으로 이뤄진다. 이중 탈염은 원유 내에 포함된 염화나트륨(NaCl)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본격적인 공정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염화나트륨의 염분은 고온에서 분해되며, 분해된 염화 이온(Cl⁻)은 정제 설비 겉표면에 달라붙어 치명적인 부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안유찬(계명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는 “탈염은 안정적인 공정 운영과 설비 보호를 위한 기초적인 단계”라고 설명했다.

탈염 공정의 핵심은 원유에 물을 주입해 염화나트륨을 분리하는 데 있다. 물과 기름이 서로 섞이지 않는 성질을 이용해 원유 내 염화나트륨만 선택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 염화나트륨은 양이온인 나트륨 이온(Na⁺)과 음이온인 염화 이온으로 구성돼 있다. 염화나트륨이 물 분자(H₂O)와 만나면 기름은 물과 섞이지 않고 염화나트륨만이 물에 녹아든다. 물 분자는 산소 원자와 수소 원자로 이뤄져 있어 각각 나트륨 이온과 염화 이온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 분자와 결합한 염화나트륨은 원유와 분리된 미세한 물방울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이후 미세한 물방울을 원유와 완전히 분리시키는 ‘전기적 공정’이 뒤따른다. 원유에 강력한 고전압을 가해 전기장을 형성하면, 분산돼 있던 물방울은 일시적으로 양전하 혹은 음전하를 띤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겨 거대한 물방울로 결합한다. 물방울끼리 뭉쳐 밀도가 커지면 중력의 영향으로 하단에 가라앉으면서 염화나트륨이 깨끗하게 분리된다. 김성원(한국교통대학교 화공생물공학과) 교수는 “염화나트륨과 물 분자가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입자가 커진 염분을 밀도 차에 의해 원유로부터 완벽히 분리해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료 출처 : 대한석유협회 홈페이지]

증류는 원유를 가열해 원유의 여러 물질을 기체로 만든 후, 각 물질의 끓는점 차이를 활용해 다시 액체로 변환하는 공정이다. 끓는점이 낮은 성분은 먼저 증발해 위쪽에서, 높은 성분은 아래쪽에서 응축돼 서로 다른 층으로 나뉜다. 이렇게 분리된 각각의 성분을 ‘유분(油分)’이라고 한다. 증류의 핵심 원리는 유분 내의 탄화수소(CₙHₙ) 분자를 고온·고압으로 반응시켜 떼어내는 것이다. 탄소 원자(C)와 수소 원자(H)로 구성된 탄화수소 분자는 서로 결합해 인력을 유지하려는 성질을 띤다. 분자 구조 내의 탄소 원자 수가 많을수록 이 인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이를 떼어내 기체로 만들려면 인력을 이겨낼 수 있는 고온의 열이 필요하며, 인력이 강할수록 원유의 끓는점은 높아진다. 김병준 교수는 “미세한 물리적 특성 차이를 정교하게 이용하는 것이 복잡한 원유를 유분별로 분리해 내는 증류 공정의 핵심 원리다”고 말했다.

증기 형태의 원유는 탄화수소 분자가 해체된 상태로 증류를 위해 원통형 구조인 ‘상압증류탑(CDU)’ 하단부로 투입된다. 원유는 상압증류탑 내부에서 위로 상승하며 자신의 끓는점보다 낮은 온도의 층에 도달하게 된다. 이때 원유가 더 이상 끓지 않고 탄소 원자와 수소 원자가 다시 결합하며 증기 상태에서 액체가 순차적으로 변환된다. 증류를 거친 원유는 ▲LPG ▲등유 ▲경유 ▲중유 등의 유분으로 분리된다. 안 교수는 “상압증류탑은 상단으로 갈수록 온도가 낮아지는 구조를 통해 끓는점에 맞는 위치에서 응축되도록 설계된 장치”라고 설명했다.

▲증류 과정에 이용되는 상압증류탑 [사진 제공: 여천NCC]

원유 분류가 끝났다면, 정제를 통해 대기 오염의 주범이자 설비 부식의 원인인 불순물을 제거한다. 이를 위해 대표적으로 ‘수소화 탈황법’이 사용된다. 증류를 거친 유분 내에는 여전히 황(S)과 질소(N) 등 불순물이 포함돼 있다. 황과 질소는 탄소 원자와 수소 원자 내부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김재유(경기과학기술대학교 생명화학공학과) 교수는 “수소를 주입해 화학적으로 불순물을 밀어내고 탄화수소 본연의 순도를 회복해야만 비로소 엔진의 성능을 보장하고 환경 규제를 충족하는 청정 연료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수소화 탈황법은 유분 내에 ‘수소’를 주입하면서 출발한다. 알루미나(Al₂O₃) 등의 촉매로 유분 내 수소 분자(H₂)를 고온·고압으로 반응시키면, 촉매는 수소 분자를 수소 원자 상태로 쪼갠다. 이때 쪼개진 수소 원자는 불안정한 성질을 가져 개별로 존재하는 황이나 질소와 결합하려는 성향을 띤다. 따라서 수소 원자가 황과 질소와 결합해 황화수소(H₂S)와 암모니아(NH₃)로 변환된다. 이후 냉각 과정을 거쳐 유분은 기체에서 액체 상태로 응축된다. 황화수소와 암모니아는 기체 상태에서 탑 상부로 배출된다. 김병무(울산대학교 LINC3.0 사업단) 연구교수는 “수소 분자를 반응성이 큰 원자 상태로 쪼개 탄소 사슬에 박힌 황과 질소를 강제로 제거하는 것이 수소화 탈황의 핵심이다”고 밝혔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이 끝나면 ‘블렌딩’ 과정이 이어진다. 자동차, 각종 설비에 연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블렌딩은 정제가 끝난 여러 유분을 적절한 비율로 배합하고 첨가제를 투입해 제품의 성능을 최적화하는 최종 공정이다. 단순히 기름을 섞는 것이 아니라 연소 효율을 높이거나 저온에서도 연료가 굳지 않게 하는 등 성능 규격을 충족시키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다. 김재유 교수는 “블렌딩은 연소 효율과 환경 기준 등 까다로운 시장 규격을 충족함으로써 제품으로 유통되기 전 최종적인 가치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그중 항공기의 연료가 되는 항공유는 등유 유분에 기반한 블렌딩을 거쳐 탄생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항공유 정제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매우 발달돼 있다. 높은 고도에서 비행하는 항공기 특성상 낮은 온도에서도 연료가 얼어붙지 않도록 빙점 강하제를 섞는 방식이다. 이러한 정밀 배합 기술 덕분에 국내 생산 항공유는 세계 최고 품질을 인정받았다. 실제로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024년 대한민국의 항공유 생산량은 1억 5,000만 배럴 규모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치를 기록했다. 김병무 연구교수는 “항공유는 영하의 환경에서도 얼지 않고 흐를 수 있어야 해 정밀한 강하제 배합이 필수적이다”며 “블렌딩 기술은 항공기의 안전을 보장하고 우리가 안심하고 해외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술이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현재 정유 산업을 둘러싼 외부 환경은 녹록지 않다. 최근 미국-이란 전쟁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돼 국제 유가가 급등했다. 실제로 국내 정유사들의 원가 부담 역시 가중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국제 유가는 전쟁 전후로 무려 50~70%가량 상승했다. 이에 원유 수급 공백이 수개월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구수진(한국폴리텍대학교 석유화학공정과) 교수는 “에너지 자급률이 낮은 상황에서 외부 지정학적 리스크는 산업 전반에 큰 위협이 된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국내 정유업계는 항공유와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의 생산과 수출에 더욱 주력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실제로 올해 1분기 항공유 수출량은 전년 대비 약 41% 증가한 2,309만 배럴을 기록하며 위기 속에서도 국가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박기태(건국대학교 화공·생명·에너지공학부) 교수는 “국내의 기술력 덕분에 유가 위기 속에서도 항공유 등 고부가 제품 수출로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다”며 “이러한 기술은 비산유국인 한국이 글로벌 주도권을 유지하는 핵심 동력이다”고 부연했다.

국내의 원유 정제 기술은 이제 전통적인 에너지 생산을 넘어 미래를 향하고 있다. 최근에는 차세대 항공유인 SAF가 차세대 연료로 주목받고 있다. SAF(Sustainable Aviation Fuel)는 기존 원유 대신 폐식용유나 바이오매스 등 친환경 원료를 정제해 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지속 가능한 연료다. 이는 글로벌 항공 업계의 탈탄소화 흐름에 맞춘 핵심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SAF는 단순히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차원을 넘어 에너지의 근본적인 원료를 전환함으로써 산업 전반의 친환경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구 교수는 “SAF 생산 기술은 정유업이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벗고 친환경 에너지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며 “전통적인 정제 기술의 정교함이 친환경 원료와 결합해 새로운 에너지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폐플라스틱이나 폐비닐에서 석유 성분을 다시 뽑아내는 ‘열분해 플랜트’ 기술 역시 차세대 에너지 기술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폐자원을 단순히 소각하는 대신 정유 공정의 대체 원료로 전환해 자원 순환을 실현하는 순환 경제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박 교수는 “전통적인 정유 공정은 탄소중립과 친환경 기조에 따라 신소재 산업과 융합하고 있다”며 “자원을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탈바꿈시키는 ‘순환 경제’의 핵심 기지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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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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