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역사는 ‘문학’의 성질이 매우 강했다. 당시는 철학이 ‘만학의 어머니’로서 모든 학문을 지배하던 시대였으므로, 소위 ‘문사철’이라고 불리는 문학, 사학, 철학이 별개로 구분되지 않고 같이 다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역사는 철학의 일환으로 사유되는 종류의 학문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의 저서인 『역사』가 당시 문학의 한 갈래인 서사시와 비극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바로 그 단적인 예다.
현대 역사학계는 랑케가 주장하는 ‘진리로서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문용선(역사문화학부)교수는 이를 ‘라쇼몽 효과’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라쇼몽 효과란 ‘라쇼몽’이라는 영화에서 나온 개념으로, 똑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경험자의 관점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지는 현상이다. 역사는 단순히 객관적인 ‘사료’들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역사가의 주관은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결국 저명한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카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했듯이, 역사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재’에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현대의 역사학에서는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 것을 중시한다. 앞서 말한 사회사, 문화사, 경제사와 같은 것들이 바로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는 역사가의 역할이 단순히 ‘기록’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논’하는 것까지 확대됐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문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최근 논란이 되는 국정교과서는 이런 역사학의 본분에도 맞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오직 ‘정부’만이 ‘사관’이 되어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역사를 편찬하는 것은 역사학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역사를 ‘논’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일본군과의 로맨스나 매춘을 목적으로 일본군과 동행한 위안부 등의 언급으로 이슈가 되었던 『제국의 위안부』가 좋은 사례이다. 저자인 박유하 교수는 책의 내용에 대해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여전히 논란은 진화되지 않고 있다. 역사를 논한다면 대체 어디까지 논해야 하며, 역사의 상대성이 과연 무한정 용인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까지 뾰족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흔히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역사는 우리시대를 대체 어떻게 평가할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역사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다. 먼 미래, 이미 과거가 된 우리시대의 ‘기록’과 현재가 된 미래시대의 ‘논(論)’만이 지금의 우리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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