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에 개봉한 영화 ‘컨택트’의 주인공 루이스 뱅크스 박사는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인지하는 외계생물체인 ‘햅타포트’의 언어를 학습함으로써 그들과 같이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는 영화에서도 설명되듯이 ‘언어가 사고를 형성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사피어와 워프의 가설’에 따른 것이다. 루이스는 외계인의 언어를 통해 그들과 동일한 사고체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언어지배론’을 근대 최초로 언급한 학자는 19세기 독일의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다. 훔볼트는 “언어는 그 민족의 고유정신을 표상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열강들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열등한 민족의 언어는 태생적으로 열등한 고유정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서구의 우월한 언어를 학습시킴으로써 이를 개선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와 고유정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20세기까지 쭉 이어졌다. 일제가 말년에 조선어를 금지했던 것과 최근까지도 ‘순우리말 지키기 운동’ 등이 있었던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앞선 예시들은 한국어가 우리 민족의 고유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하에 일어난 일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인간이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그 인간의 언어습관에 의한다는 ‘사피어와 워프의 가설’은 20세기 당시 학계에 센세이셔널한 충격을 가져왔다. 언어학자인 에드워드 사피어가 주장하고 그의 제자 벤자민 리 워프가 발전시킨 이 가설은 이누이트어를 실례로 제시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다. 이누이트어에서 눈(雪)을 표현하는 단어는 7개인데, 반면 영어에서 눈을 표현하는 단어는 그냥 눈(snow) 하나일 뿐이다. 이처럼 이누이트들은 영국인들과는 다르게 자신들의 언어에 따라 눈을 7개로 나누어 인식하고 사고한다.
이런 가설에 대해 고창수(응용인문학부 국어국문전공) 교수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누이트어에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7개라는 점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사례로 보긴 힘들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누이트어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와 같은 ‘포합어’이기 때문이다. 포합어는 단어와 문장이 구분되지 않는 방식의 언어인데, 이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름으로 ‘늑대와 같이 춤을’ 등과 같은 어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들에게 ‘늑대와 같이 춤을’은 단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례는 많이 발견되고 있다. 프랑스인과 스페인 사람에게 ‘만약 탁자가 당신에게 말을 건다면 무슨 목소리일 것 같은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이 ‘여성의 목소리’라고 답변했다는 연구결과가 바로 그중 하나이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에서 탁자는 여성형 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영화 ‘컨택트’와 같은 일이 가능할까? 고 교수는 이를 피쳐폰과 스마트폰의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피쳐폰은 스마트폰처럼 통화와 문자가 가능하지만, 스마트폰의 기능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즉, 인간(피쳐폰)이 외계생물체(스마트폰)의 언어를 배운다고 하더라도, 그들처럼 초월적인 사고능력을 완전히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피어와 워프의 가설처럼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학설은 현 학계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비록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줄지언정, 지배한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영어를 주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영국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언어가 그 사람의 사고를 바꾼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다.
현대에 이르러 각국의 언어는 서로 활발하게 교류하며, ‘빼박캔트’나 ‘쿨하다’와 같이 ‘한국어화’된 외국어들이 일상생활에서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만일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면, 우리는 대체 어느 나라의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사람이고, 문화는 문화이며, 언어는 언어일 따름이다.
이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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