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보드(Billboard)』. 우리에겐 ‘빌보드 차트’로 유명한 『빌보드』는 사실 음악순위 집계기관이 아니라 음악잡지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빌보드 차트’는 말그대로 음악잡지인 『빌보드』가 집계한 음악순위인 것이다. 만약 『빌보드』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면 어떨까? 어쩐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모습과 다소 괴리감이 있는 가정이지만,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조선시대판 빌보드’라고 할 법한 책이 있다. 바로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이 그것이다.
때는 조선시대, 당시 트렌드를 선도했던 한양에서는 ‘가곡’이라는 음악 장르가 일대 대히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가곡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음악 장르로, 초기에는 상류층이 즐겨 듣던 ‘클래식’이었으나, 시대가 지나고 리듬이 빨라지면서 하위 계층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가곡은 전문가객의 보컬과 그 패들의 연주로 구성되었는데, 리더의 역할을 맡는 전문가객 1명을 위시로 하여 최소 6명의 인원이 모여 가곡을 불렀다. 현재로 말하자면 ‘밴드(Band)’인 것이다. 대인원이 모이고 전문가객이 필요하다는 이런 가곡의 특징 때문에 한 명이 부르기 쉬운 형태의 ‘시조’라는 장르가 파생되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전문가객으로 활동했던 김천택은 가곡들이 기록되어 전해지지 못하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1728년 『청구영언』이라는 저서를 완성한다. 이 책은 당대 끊임없이 사랑을 받고 있던 ‘유행가’들을 총집대성한, 조선 최초의 가집이었다. 김천택이 이 책에 저술한 가곡의 양은 상당히 방대한데, 고려 말의 명반부터 당대에 창작된 최신곡까지 총 580여 수의 작품을 수록했다. 지금이야 매일 수천 곡의 음악이 쏟아져 내리는 시대지만, 당대의 상황을 생각하면 가히 ‘조선의 빌보드’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다.
『청구영언』에는 다소 낯부끄러운 내용의 곡들도 다수 수록되어있는데, 김천택은 이를 ‘만횡청류’라고 하며, 당대에 전해지던 가곡이라면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수집했다. 해당곡들 역시 당대에 유행했던 것이나, 당대 조선이 유교사회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남녀상열지사’를 수록한 김천택은 대중음악의 가치에 눈뜬 최초의 지식인일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이런 영향을 받아 『청구영언』 이후 발간된 조선 3대 가집 중 하나인 『해동가요』에서는 양반들이 창작한 점잖은 퇴폐시들이 실리기도 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런 모습들은 당시 조선사회가 점차 개방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 말부터 창작자의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가곡이라면 모두 수집한 책이니만큼, 이 책에서 한번쯤 들어봄직한 인물의 가곡이 나오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정몽준의 ‘단심가’와 이방원의 ‘하여가’부터, 최영이나 이성계와 같은 무장,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과 같은 명공(名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이 당대 상황을 노래하는 가곡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의 저자인 김천택은 당대 가곡을 짓거나, 부르기도 하는 ‘싱어송라이터’이자,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중인 출신의 여항인, 한편으로는 왕족과 중인 계층의 전문가객까지 두루두루 왕래하는 시대의 풍운아였다. 그는 왕족부터 전문가객에 이르는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이름 높은 양반들의 고상한 가곡부터, 저잣거리에 나도는 낯뜨거운 가곡까지 대규모의 가곡을 수집할 수 있었다. 이걸 생각하면 『청구영언』은 어쩌면 김천택이라는 인물이 아니었으면 영영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조선시대판 빌보드’라고 부를 정도로 『청구영언』의 영향력 역시 뛰어나다. 20세기까지 편찬된 가집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청구영언’이라는 제목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의 신하영 학예연구사가 김천택을 “가곡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청구영언』과 김천택이 우리 한국문학사에 남긴 족적은 거대하다. 이쯤되면 ‘조선시대의 빌보드’가 아니라 『빌보드』를 두고 ‘미국의 청구영언’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만일 ‘조선시대의 빌보드’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9월 3일까지 국립한글박물관에 찾아가면 친절한 설명과 함께 실물을 영접할 수 있다. 흥미가 있는 사람은 서두르도록 하자.
이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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