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시장의 변화와 더불어 게임 산업에 종사하는 다양한 사람들 또한 변화를 맞았다. 정준호 일러스트레이터도 이런 변화와 함께해온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흔히 말하는 1세대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다. 현재도 게임 일러스트를 그리고 있으며, 아트 디렉터의 일도 겸하고 있다.
직업이 아니었던 길
그가 이 업계에 발을 들였을 무렵, 게임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은 직업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림 그리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게임 일러스트를 그리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도 이런 케이스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해 그는 “만화가를 꿈꾸고 있었는데 당시 출판 만화가 하락세를 보이면서 데뷔하기 어려워졌다. 지금처럼 웹툰 시장이 활발하게 형성돼 있지도 않았고, 덩달아 IMF가 터지면서 더 이상 만화를 그릴 수 없었다. 결국 난 꿈을 포기해야했다”며 “그나마 당시에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일이 게임 일러스트였다. 생계를 위해 계속 게임 일러스트 아르바이트를 했고, 어느새 이 업계에 들어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원화가’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사정이 어려웠던 건 게임 일러스트 쪽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게임 시장의 규모는 지금과는 달리 매우 작았고, 게임 자체는 여러 부분을 합쳐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일러스트 작가가 대우를 받는 일은 드물었다.
일러스트 작가를 대중들이 인식하게 된 것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김형태 일러스트 작가가 <창세기전3>의 일러스트를 맡고, 해외에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일러스트 작가를 직업군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단어가 없었다. 따라서 일러스트 작가들은 자신들을 ‘원화가’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들이 명성을 더 쌓으면서 사람들이 이들을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정준호 작가가 이름을 알린 때도 이 시기였다. 그는 “원래 김형태 작가가 맡기로 한 <리니지2>의 일러스트를 담당하게 됐는데, 이 게임이 흔히 말하는 대박을 치면서 입지가 높아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프린터가 돼버린 일러스트레이터들
이렇게 명성을 쌓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등장했지만, 이들이 수동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분위기는 계속됐다. 정준호 작가는 “게임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기 때문에 아트 디렉터가 좋다고 할 때까지 그림을 다시 그리고 수정하는 등 수동적으로 일해야 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당시 이 업계에서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자리는 아트 디렉터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아트 디렉터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회사의 간부가 기회를 준 덕분에 그는 아트 디렉터 자리에 갈 수 있었다.
아트 디렉터는 게임 콘셉트에 맞는 일러스트를 완성하기 위해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작품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다 나름대로의 개성과 특성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렇다보니 게임의 콘셉트와 다른 그림이 종종 나오기도 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른 일을 맡게 된 경우에는 일의 효율성이 떨어지기도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게임 회사를 운영하는 사업자들은 사내에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모두 모아서 외주를 주는 식으로 다양한 콘셉트의 일러스트를 그리게 했다. 이 방식은 초창기만 해도 굉장한 효율성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독이 됐다. 이들은 원래 하나의 게임개발팀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이 만드는 게임에 대한 뚜렷한 목적성과, 팀에 대한 소속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내에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모두를 한 팀으로 모아서 작업을 진행하니, 뚜렷한 목적의식도 소속감도 없어진 것이다. 이들은 점점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이전 방식에서는 하나의 게임을 개발하면 당분간 휴식기간을 주었는데, 한 팀으로 만들어지면서 하나의 일이 끝나면 다른 일에 바로 투입되는 방식으로 끝없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런 상황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정준호 작가는 “사람들이 회사에서 기계처럼 일을 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 수밖에 없고, 그림에 대한 열정도 없어졌다. 결국 그림들이 하향평준화가 되어 실패를 초래하는 과정을 4년에 걸쳐 보게 됐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프린터가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게임 개발의 미래
그가 말하는 게임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사업자 중심의 게임 개발 문화다. 이에 대해 그는 “외국의 경우 게임 개발을 담당하면 그 후의 시리즈나 차기작도 같은 팀이 계속해서 개발하게 되는데, 우리나라는 게임이 성공하면 나중에 차기작을 개발할 때 팀원이 전부 바뀌어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업자들과 개발자들이 이원화 된 상태에서 사업자 중심으로 게임을 개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은 개발자들에게 ‘자신의 게임’이라는 것보다 ‘회사의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가 바뀐다면, 게임 개발진들의 목적의식과 소속감이 뚜렷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근 모바일 게임시장에는 개발자들이 자체적으로 게임을 개발해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례가 많다. 이처럼 기존의 사업자 중심이 아니라 개발자 중심으로 게임 개발이 이뤄진다면, 전작을 만들면서 생긴 노하우와 경험들이 쌓이면서 더 좋은 게임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이 조성돼야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처우가 향상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린다.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는 시작부터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그는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들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앞으로 게임 개발 문화가 바뀔 수 있다면 충분히 긍정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소비자들이 더 좋은 게임을 접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게임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과 게임 개발진에 대한 처우가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종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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