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흐릿한 역사, 선명하게 돌아오다(한성대신문, 527호)

    • 입력 2017-10-16 00:00

 지난 9월 19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분청사기상감 이선제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 1점을 일본인 소장가로부터 기증 받아 국내로 들여왔다.
이 묘지의 주인인 이선제는 조선 전기에 활약했던 역사가이자 정치가, 지방 토호로 이 묘지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 행방이 묘연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선제는 정확히 어떤 인물이고, 왜 지금에서야 그의 묘지가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걸까?
이선제, 그는 누구인가
이선제(李先齊, 1390~1453)의 호는 필문이며 본관은 광주(光州)다. 그는 세종 원년에 급제하고, 이후 30년 이상을 관직에 있었다. 이수경(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 학예연구관은 “이선제의 관직 생활은 활동 내용에 따라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기간동안 이선제는 사관으로 서 『태종실록』과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검토관으로 활약하는 등 학자로서 집현전에 몸담았다.
전반기가 학자로서의 활동기라면, 후반기는 정치적 활동기였다. 이선제는 10년 동안 6조의 고급관료인 참판으로 그리고 강원도 관찰사로의 직무를 수행 했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직접 체험한 것과 집현전 재직 당시 살펴 봤던 옛 제도를 바탕으로 각종 정책 상서를 올리는 등 활발한 정치적 움직임을 보였다.
이 연구관은 “이선제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여름에 진상하는 날고기는 운반 과정에서 부패하기 쉽다’고 상소를 올린 후부터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이선제는 관직에서 물러 난 후에도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이선제가 있던 당시, 광주는 광주목에서 무진군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이 연구관은 그 이유에 대해 “광주사람이 애첩을 가로챈 광주의 목사(牧使)를 구타한 사건 때문”이라며 “당시는 관리를 폭행한 강상죄가 삼강오륜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매우 무겁게 취급되던 시절 이기 때문에 고을의 호칭이 강등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선제는 광주의 원로들과 함께 임금에게 상소하여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복귀시켰다. 또한, 그는 ‘광주 향약’을 실시하여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묘지 반환 작전
이선제는 30년 넘게 다양한 업적을 쌓은 인물이지만, 최근까지 그 행적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 연구관은 “이선제는 그의 5대손인 이발과 이길 형제가 정여립 모반 사건이라고 불리는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멸문의 화를 당하면서, 300년 동안 출몰 연대마저 알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잊혀 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1998년, 분청사기에 상감기법으로 만든 필문의 묘지가 일본으로 1차 밀반출 시도됐고, 이 과정에서 공항 문화재감정관실은 묘지를 필사해 상세한 자료를 남겼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이선제에 대한 정보가 학계에 전해졌고, 묘지의 소재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밀반출을 막은 듯 했지만, 당 시 밀반출 시도가 범죄 요건에 성립하지 않아 압류조치는 물론, 수사기관에 신고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달 뒤, 이선제 묘지는 문화재 밀수단에 의해 여행용 가방에 숨겨져 일본으로 밀반출돼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그 후 2014년 10월, 재단은 일본지역 문화재 유통실태를 조사하던 중 중고미술시장에 매물로 나온 이선제 묘지를 발견했다. 재단은 묘지의 출처를 확인했고, 밀반출되기 전에 기록한 필사본과 이를 비교해 묘지가 불법반출품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재단은 일본인 고미술상을 찾아가 묘지를 매물로 내놓은 일본인 소장가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암 투병 중이었던 70대 후반 소장가는 대기업 은퇴 후 고미술품을 수집하다가 묘지를 입수 했을 뿐, 그것이 불법반출품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고 밝혔다.
소장가가 사망한 후 재단은 소장가의 유족인 도도로키 여사를 다시 만나 묘지의 국내에 기증 반환한 것을 설득 했다. 도도로키 여사는 이선제 후손들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배려하고, 나아가 한일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 묘지를 무상으로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2017년 8월, 묘지는 무사히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강임산(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 원팀) 팀장은 “그 당시 도도로키 여사는 묘지 기증을 통해 한일 간 신뢰와 우정이 더욱 두터워지고, 한일 관계가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메시지를 전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어렵게 환수한 필문의 묘지는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필문의 묘지는 사료적 가치와 도자기의 문화재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강 팀장은 “이선제는 조선전기 호남을 대표하는 실존인물인데 그동안 정확한 자료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며 “필문의 묘지에는 그에 대해 소상히 기록돼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조선전기 묘지가 희소하고, 전문가들은 이선제의 묘지가 현존하는 조선전기 묘지 가운데 그 가치가 월등하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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