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문 사회 면에서 ‘혐오’라는 키워드의 기사를 찾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정치적, 사회적, 성별적인 다양한 이유로 사회는 혐오를 자행하며, 기꺼이 생산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주변을 조금만 신경 써서 둘러본다면, 본인이 자각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혐오를 마치 유희마냥 소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혐오의 생산과 소비는 당장 대학가를 들여다보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입학 전형에 따라 같은 대학생들끼리도 ‘수시충’, ‘적성충’, ‘논술충’ 따위의 말로 폄하하는 것은 아마 대학생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우리학교의 경우를 참조하더라도, 주간 학생들이 야간 학생들을 ‘야간충’이라고 부르며 분란을 일으키는 일은 현재까지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다.
혐오가 사회적 트렌드라는 사실은 대학가를 벗어나더라도 명확해진다. ‘맘충’, ‘개저씨’, ‘급식충’······. 이전부터 문제행위를 일으킨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게 있었던 일이지만, 어떤 계층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혐오 표현을 만들어내는 것은 비교적 최근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조금 더 면밀하게 바라본다면, 사람들은 무언가 ‘혐오’할 거리를 찾아나서고 있는 듯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지난 ‘240번 버스 기사’ 사건이나, ‘한샘 사내 성폭행’ 사건만 보더라도 네티즌들은 너무나 손쉽게 ‘가해자’를 확정짓고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쏟아냈고, 이 광경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증오주간’의 21세기 판을 보는 것만 같은 서늘함을 선사했다. 혐오를 생산하는 것을 넘어,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그는 웃음이 인간이 느끼는 가장 저열한 즐거움이라고 표현했다. 웃음을 주는 ‘우스꽝스러움’이 상대방의 추락이나 불행 등에 기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 비추어본다면, 이러한 현상의 저변에 깔려있는 원인이 무엇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혐오’의 낙인을 찍는 것만큼 상대방을 추락시키는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한 양상이 더욱 가속화되는 중심에 대학생을 전후로 한 청년세대가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이렇게 ‘혐오’에 열광하는가? 사실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쥐고 있다. 최근 청년들은 ‘N포세대’라고 불리며, 이전의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를 넘어 N가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지금 사회는 ‘혐오’ 외에 다른 즐거움을 얻기에는 너무 힘들어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1984』에서 시민들은 매일 2분 동안 반역자 ‘골드스타인’에 대해서 증오를 쏟아붓는 시간을 가진다. 작금의 혐오 문화가 어쩌면 ‘현실’을 향해서 청년들이 악다구니를 쏟아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는 것은, 비단 내가 같은 청년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주형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