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만약 현대 한국에 사르트르가 살아 돌아와 똑같은 말을 한다면, 아마 그는 위대한 철학자보다는 실없는 아재개그 구사자로 기억되지 않을까.
하지만 내 짧은 인생을 반추해 보건데, 현대 한국에서도 사르트르의 명언은 우리네 인생과 놀라울 정도로 합치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가 말하는 B와 D는 잘 몰라도, 적어도 인생만큼은 ‘C’ 음절로 시작하는 한국어 단어라는 점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구태여 그 단어를 지면에 적어놓는 풍류 없는 짓거리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당신의 명석하고도 속세에 찌든 두뇌는 이미 능히 답을 찾았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연 위인의 명언은 시대와 공간, 심지어는 언어마저도 초월하는 법이다.
현대는 ‘반(反) 지성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이전에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어졌던 위대한 고전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스개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권위 붕괴의 시대’인 것이다. 왜, 철학자 한나 아렌트조차도 “권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권위가 무엇이었는가?”라고 반문하지 않았나. 물론 아렌트는 ‘진정한 권위’에 대한 탐구의 과정으로 발설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렇게 물어야 할 정도로 권위가 가진 정체성은 희미하기만 하다.
근대까지, 권위는 ‘글을 생산하는 능력’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영어에서 ‘저자’를 뜻하는 단어인 ‘Author’와 ‘권위’를 뜻하는 단어인 ‘Authority’의 형태적 유사성에 집중해보면 이 사실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문자를 배우고, 그 문자를 끊임없이 늘어놓고 정돈하여 장문의 책을 완성하는 능력이야말로 ‘어중이떠중이’들은 꿈도 못 꾸는 매우 강력한 권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당대에 ‘책’이라는 것은 아무나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쇄판을 만들고, 대량의 종이를 들여 제본을 하고,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한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동안 본인의 저작에 공을 들인 작가, 철학자, 과학자 등에게나 허용되던 일이었다.
이는 최근까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은 매일 ‘글’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그 자체로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저널리즘’이라는 품격이 요구됐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언론이 쏟아내는 ‘글’과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쏟아내는 ‘글’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공신력, 필력, 정보······ 여러 가지를 세어볼 수 있지만, 이조차도 ‘속보 경쟁’에 불붙어 저널리즘을 져버리는 언론들을 생각하면 영 체신이 서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 시대, 언론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구태의연한 ‘권위’에게 물어볼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다.
이주형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