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人> 시조라는 두레박으로 우물 안 깊은 내면을 긷다 (한성대신문, 538호)

    • 입력 2018-10-22 00:00
시조 시인 서희정

‘冬至ㅅ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 여/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어 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위 구절은 학창시절 배운 시조 가운데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이다. 일반인이 읽기 어려운 고어에, 현대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정서까지. 오죽하면 고전문학을 기피하는 학생들이 생겨날 정도다.
  일반적으로 현존하는 시조 대부분은 고려 또는 조선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때문에 전공자가 아니라면 ‘옛날 시를 시조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라며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어딘가에서 시조를 쓰 고 있는 이들이 있고, 이 중에는 우리학교 동문도 있다. 바로 서희정(무역 10) 시조 시인이다.
  서 시인은 2017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서 <솥>으로 등단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솥>에 대해 “가족과 사회가 해체된 시대, 그가 느낀 일상적인 생각과 정서를 담백하게 묘사해낸 작품”이라고 평했다. 삭막해진 세상 속에서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노래한 그는 어떻게 시조 시인의 길을 걷게 됐을까?

시조 입문, 그 멀고도 험난한 여정
  서 시인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 2년 동 안 자신을 돌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문단(文壇)에 등단하기로 결심한 것도 이 때다. 대학생 때부터 취미 삼아 자유시를 습작하곤 했던 그는 졸업 이후 자연스레 시인 등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 그에게 족쇄로 작용했다. 국문학도가 문단을 꽉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존경하는 시인의 문하생 대다수는 국문학 전공자였고, 시를 투고하려 출판사에 문의해도 직원은 다짜고짜 출신 학과부터 묻기 일쑤였다. 문단의 높은 문턱을 몸소 느낀 그는 등단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찰나, 서 시인은 고등학생 시절 고전문학을 공부할 때 느낀 시조의 매력을 어렴풋이 회상했다. 3·4조, 3장 6구 45자 내외, 종장 첫 음보 3음절로 대표되는 엄격한 형식과 문장 속에 적재적 소로 배치된 단어들, 그 속에서 느껴지는 절제미 등···. 당시 그는 이러한 시조의 간결미에 반했다.
  현실적 여건 또한 자유시에 비해 시조가 더욱 유리했다. 시조 문단은 40~50대 중년층이 주로 등단하는 터라 젊은 피가 부족했다. 20대인 서 시인이 도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조 문단에 등단하기로 결심했다.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면 최소 작품 5편을 출품해야 한다. 습작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30편은 써야 겨우 응모할 수 있는 셈이다. 고단할법한 등단 준비 과정은 오히려 서 시인에게 위안을 줬다. 취업 준비로 힘들었던 마음을 시조로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꾸준히 준비한 끝에 그는 2016년 중앙일보 주관 중앙시조백일장에서 장원을, 2017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에서 등단의 영예를 안았다.

▲카페에서 습작하고 있는 서희정 시인. 그는 카페에서 자주 시를 쓴다고 이야기했다.

“저는 ‘깊은 우물’인 것 같아요”
  서 시인은 그의 대표작 <솥>처럼 가족을 소재로 한 시조를 자주 썼다. <신발의 역사>는 저녁 무렵 부모님이 퇴근한 후 신발로 가득 찬 현관을 배경으로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동생과 단둘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 때 텅 빈 현관을 바라보며 적막감을 많이 느꼈죠. 그런데 부모님이 저녁에 퇴근하시고 나면 현관이 신발로 가득 찼어요. 그 모습을 볼 때 제 마음도 따뜻해졌고요”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서 시인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가족들은 끝까지 저를 믿고 묵묵히 응원해줬어요. 그 덕분 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아요”라고 고백했다. 가족과 서로 의지하며 힘든 시기를 견뎌냈기에 그녀가 ‘가족’에 더욱 애착을 품은 것은 아닐까.
  서 시인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깊은 우물’인 것 같아요. 깊은 우물을 두레박으로 긷다 보면 끝 없이 물이 나오잖아요. 그 우물이 딱 제 모습이거든요. 사실 저는 남들에게 보여준 것보다 아직 그러지 못한 모습이 더 많아요”

  그는 미처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자신의 내면을 세상 밖으로 꺼내고자 ‘시조’를 하나의 ‘두레박’으로 삼은 모양이다.
 
  서 시인은 내년에 첫 시집을 발간할 계획이다. 내년이면 등단 3년차가 되니 ‘시집을 낼 때도 됐다’는 생각에서다. 시조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해 문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서희정 시인. 앞으로 그가 시조로 길어낼 우물물 맛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윤희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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