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에 올라> ‘원인 제공’이라는 것은 없다 (한성대신문, 559호)

    • 입력 2020-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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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0-09-20 13:36

시민활동가 김영경 씨는 지하철에서 불법 촬영 현행범을 검거한 바 있다. 주변 시민의 도움을 받아 검거했지만, 그가 현장 인근에서 들은 것은 ‘여자도 잘못이 있네’라며 여성을 탓하는 목소리였다. 그가 겪은 사건처럼 사회는 성범죄가 발생했을때 피해자의 책임을 이야기하곤 한다. 피해자의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을 지적하고, 조신하지 못한 행동이 본능을 자극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해자에게 아무런 빌미도 제공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피해자’에게만 동정이라는 시혜를 베풀어 주는 꼴이다.

옷차림이 성범죄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히잡을 입은 여성에게는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아야 마땅하다. 무엇을 입느냐와 관계 없이 성폭력은 어떤 사회에서나 발생한다. 외부 자극을 참지 못해 범죄가 발생한다는 생각은 모순이다. 포장되지 않은 빵이 사람의 식욕을 자극했다고 해서, 계산하지 않고 빵을 훔쳐간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최근 일산 동부경찰서가 불법 촬영 근절을 위해 실시한 에스컬레이터에서 ‘옆으로 서기’ 캠페인이 여론의 비판을 받고 중단됐다. 옆으로 서면 시야각이 넓어져 불법 촬영을 예방할 수 있다는 논리로 추진된 캠페인이다.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옆으로 서면 뒤에서 누가 무얼 하는지 감시 할 수 있으니 예방 효과가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 가해자를 예방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가해를 예방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다.

성폭력 예방 교육에서 여성에게 “싫어요! 안 돼요!” 외치기와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는 것 따위를 가르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피해자에게 평소 행동거지를 바로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대상’이 아닌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태도를 가르치며 폭력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가치관을 가르쳐야 한다. 피해자가 되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되지 않는 방법에 중점을 두어 교육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성범죄와 관련해 자주 나오는 용어로 ‘성적 수치심’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심리학회 심리학 용어사전에 따르면, 수치심이란 ‘다른 사람이 자신을 결점이 있는 사람으로 바라본다고 판단할 때 발생하는 정서’이다. 피해자의 당혹스러움, 분노 등이 결부된 감정을 대변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가해자인데 피해자가 고개를 들지 못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닐까’ 하고 피해자가 자신을 탓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조현미(사회과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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