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난 /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고려시대 민중 사이에서 불린 속요 ‘가시리’의 도입부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며 버림받은 마음을 표현하는 화자의 모습은 약 10세기가 지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전문가들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사랑’이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주제라고 말한다. 김태룡(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사랑은 인류의 가장 강렬한 감정으로, 시대를 초월해 대중들의 관심사로 자리하고 있다. 대중의 감정구조가 문화적으로 표출된 결과”라고 밝혔다.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노래가 부각되기 시작한 시점은 1960년대다. 봉봉사중창단의 <꽃집 아가씨>는 “그녀만 만나면은 / 그녀만 만나면은 / 내 가슴 울렁울렁거려”라며 꽃집 아가씨를 향한 사랑을 고백했다. 오지헌 음악 칼럼니스트는 “도시화와 경제성장으로 삶이 전보다 풍요로워지면서 사랑의 초점이 ‘고향’ 등에서 ‘이성’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는 지고지순하고 헌신적인 ‘낭만적 사랑’이 돋보였다. 1970년대 송창식의 <둘이 둘이만>은 “둘이 둘이 와 / 단둘이만 와 / 단둘이만 걸어와”라며 둘만의 세상에 사는 듯한 느낌을 준다. 1980년대에도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는 “매일 그대와 아침햇살 받으며 /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라며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낭만적 사랑은 고도성장기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사랑과 연애를 통한 결혼이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해당 시기는 연애 담론이 증가하고 낭만성 속에서 남녀 관계의 장밋빛을 꿈꾸던 시절이었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에는 X세대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양상의 사랑 노래가 등장했다. 개인주의를 대표했던 X세대는 사랑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풀이된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은 “너와 내 친구는 어느새 다정한 연인이 돼있었지”라며 친구에게 자신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말했다. 또한 이승철의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는 금기시된 사랑을 표현했다.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하지”라며 ‘권태’의 감정에 현실적으로 접근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이별에 있어 여성의 주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음악도 등장한다. 특히 2010년대부터는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경향이 강해졌다. 에일리의 <손대지마>는 “니가 뭘 안다고 사랑하긴 뭘 한다고 / 됐어 필요 없어 꺼져 far away”라며 강경하게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시한다. 황은지(단국대학교 부설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교수는 “여성상의 변화, 여성의 사회적 위치 변화 등 당시 사회적 변화와 맥을 함께 하는 것”이라며 “순정파 여성상이 이별 앞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것과 달리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내뱉고 비교적 의사 표현을 명확하게 하는 가사가 늘어났다”고 밝혔다.
2010년대 사랑 노래의 또 다른 키워드는 ‘썸’이다. “요즘 따라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로 유명한 소유와 정기고의 <썸>을 시작으로 다양한 음악이 등장한다. 권현석(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썸은 관계에 대한 확장된 시선 중 하나다. 다양화된 소통 환경과 맞물려 관계를 보다 폭넓게 바라보면서 관계로서의 ‘썸’을 재발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 음악 칼럼니스트는 “썸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명사로 사용될 정도로 그 의미가 뚜렷한 단어다. 썸이 내포한 사랑의 형태를 다양하게 표현하는 음악이 다수 등장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대중가요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을 반영할 것이다. 김 학술연구교수는 “현실적 어려움으로 연애를 기피하는 청년들이 증가하고 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며 “당장의 연애 감정을 대변하는 기능은 다소 약화되더라도 사랑 노래가 연애에 대한 대안적 감정을 제공하거나 이상적 관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은 계속할 것”이라 내다봤다.
김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