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그들이 정말 꿈꾸던 것들 (한성대신문, 518호)

    • 입력 2016-11-07 19:16

(Rock) 음악의 아버지, 음악의 신 등 이들을 위해 헌정된 단어들만 나열 해봐도 비틀즈(The Beatles)는 단순한 밴드 그 이상이다. 비틀즈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시대에서 5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경향도 한층 더 짙어지고 있다. 그들의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그들을 거장의 이름으로 추앙한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록의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것도, 거장의 이름을 획득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최근 개봉한 다큐영화 <비틀즈 : 에잇 데이즈 어 위크(The Beatles : Eight Days a Week)>에서는 비틀즈의 행보와 각 멤버들의 활동 등을 아주 생생하게 담았다. 여기서 비틀즈의 모습은 순수한 청년들의 모습 그 자체다. 화면 어디서도 록의 아버지의 모습이나 거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과연 정말로 그들이 꿈꾸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비상의 시작
1962년 어느 날 리버풀의 한 레코드 가게 사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레코드 가게에 들르는 주민들이 근처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알 수 없는 밴드의 레코드를 자꾸 찾았기 때문이다. 사장은 호기심에 이끌려 이들이 공연을 하고 있는 클럽을 찾았다. 클럽 안에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소녀들로 가득했고, 무대엔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를 부르는 청년들이 있었다.
공연을 다 본 레코드집 사장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본 밴드는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청년들에게 함께 사업할 것을 제안했다. 사장의 이름은 브라이언 앱스타인(Brian Epstein), 청년들의 이름은 각각 존 레논(John Winston Lennon),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그리고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였다. 여기에 브라이언의 권유에 따라 리처드 스타키(Richard Starkey)가 합류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비틀즈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브라이언의 도움으로 EMI 레코드사와 계약을 하게 되면서 비틀즈는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랐다. 그들의 음악은 곧 리버풀 뿐 아니라 영국 전역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미국까지 날아가게 되면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 불리는 문화현상을 일으키게 되었다.
 
청춘의 에너지
사람들은 비틀즈가 대단한 싱어송라이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남긴 300여 곡은 대중음악사에 명곡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처음 비틀즈가 보여준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들은 싱어송라이터의 이미지보다 아이돌의 이미지가 더 짙다. 당대에 야드버즈(Yardbirds)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던 유명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Eric Patrick Clapton)은 클럽에서 봤던 비틀즈의 공연에 대해 수많은 여자들이 둘러싸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미 비틀즈의 음악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분명 음악을 들으러 왔는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비틀즈에 대한 약간의 질투심이 느껴지는 인터뷰지만, 당시의 모습은 분명하게 와 닿는다. 네 명의 싱그러운 청년들이 사랑한다는 가사를 미친 듯이 열창하고, 그에 화답하듯이 절규를 내뿜는 소녀들의 모습. 그것이 비틀즈의 초기 모습이었다.
이전까지 팝음악의 기본 소양은 한 명의 메인보컬이 좋은 목소리로 대중들 앞에 서는 것이었다. 그 당시를 대표하던 프랭크 시내트라나 엘비스 프레슬리도 혼자 무대 위에 올라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점잖은 목소리로 사랑을 선언했다. 그런데, 비틀즈는 네 명이나 무대 위에 올라와서 사랑한다고 절규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만들어내는 환호성 같은 화음은 소녀들을 미치게 했다. , 같은 곡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가사들도 아주 직설적이었다. 이런 새로운 스타일은 비틀즈라는 밴드를 순식간에 정상의 자리에 안착시켰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비틀즈는 계속해서 곡을 만들고, 공연을 했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작곡능력 덕분에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도 곡이 만들어졌다. 비틀즈는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음악을 만들었고, 언론 앞에서도 당당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들은 단순한 음악인이 아니라 청춘의 아이콘이었다. 비틀즈는 멈추지 않는 청춘의 에너지로 60년대를 활활 불태웠다.
 
꺼져가는 불꽃 속에서
비틀즈의 음악이 생소한 사람들은 세상에 내놓은 수많은 명곡들과 음반들 때문에 비틀즈의 수명이 엄청 길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비틀즈는 고작 8년을 활동했을 뿐이다. 같은 때에 활동한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 같은 밴드들이 아직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비틀즈의 생은 정말 짧게 느껴진다.
꽃은 아름다울 때 진다고 했던가? 미국에서의 순회공연에서 연일 동원 관객 기록을 갈아치우던 비틀즈는 관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지쳐가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멤버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내야 했다. 언론의 관심은 이 현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에서 언제 끝날 것인가로 옮아가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을 달갑지 않게 여긴 기성세대들은 록 음악은 사회에 반하는 것이라며 공격했다. 타지에 와서 인터뷰를 해도 밀리지 않는 도전적이고 자신만만한 태도 역시 그들에게는 거슬리는 행동일 뿐이었다. 특히 존 레논이 인터뷰에서 비틀즈는 현재 예수보다 인기가 있다는 발언을 꺼내면서, 반감은 더욱 확산되었다.
너무 피곤했던 것일까? 결국 비틀즈는 콘서트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콘서트를 할 수 없는 밴드란,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다. 비틀즈의 활동을 비판했던 기성세대와 언론들은 이것으로 비틀즈가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꺼져가는 불꽃 속에서도 비틀즈는 새로운 방향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들은 수많은 관중들과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맘에 들지 않았을 뿐, 계속해서 자신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활동을 끝내기까지 4년 동안 비틀즈는 무려 5개의 앨범을 새로 내놓았다. 이 앨범의 곡들은 기존의 팝 음악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록의 아버지, 음악의 신 같은 별명들도 이때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본질은 거장의 출현이 아니라 네 명의 청년들이 지녔던 창조력과 표현의 욕구였다.
 
우리는 흔히 록음악을 저항의 음악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아버지라 불리는 비틀즈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면, 록음악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데 충실한 음악일 뿐이다. 비틀즈가 스러지고 네 명의 청년들은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했고, 그것을 세상에 내놓았으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어쩌면 비틀즈가 진정으로 꿈꾸는 것은 멤버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고 싶은 노래를 하고,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이 다시 뭉치는 일은 없었다. 너무 많은 부와 관심 그리고 반감이 그들 사이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들의 음악을 스피커와 이어폰으로만 들어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지녔던 청춘의 에너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영원히.

박종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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