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에 올라> 죽음이라는 말의 가벼움 (한성대신문, 537호)

    • 입력 2018-10-01 00:00

 언젠가 어느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유튜버 박막례 씨의 일화를 다룬 게시물을 봤다. 박막례 씨는 고령의 나이에 유튜브에서 많은 인기를 얻어 화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한 영상에서 화장을 하며 특정 화장품에 관해 일화를 소개했다. 그 제품을 사러 화장품 가게에 갔는데, 직원에게 이건 젊은 애들이 쓰는 거예요라는 말을 들은 것에 대해 나이로 편을 가르더라고 말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댓글로 그 직원에 대해 총공격을 하고 있었다. 온갖 종류의 비난이 나오는 가운데, 한 댓글이 내 시선을 멈추게 했다. 원문 그대로 옮기자면, ‘교육 받기에는 이미 그따위로 자라버렸으니 그냥 뒤지는 게 답인듯요였다.
 그 직원의 말은 제 딴에는 손님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의 실수를 악마의 악행으로 만들고 있었다. 만약 그가 악의를 품고 그랬더라도 그게 죽을죄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댓글을 쓴 사람은 그에게 죽음의 선고를 내렸다. 비단 이 사건뿐만이 아니라 누군가 조금만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일을 했다는 소식만 들려오면 주저 없이 죽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죽음이라는 말을 타인에게 너무도 가볍게 쓰는 시대. 이 지나친 공격성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에서 죽음의 남용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갈등의 불씨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말을 쉽게 써버림으로써 정말로 손에, 아니 키보드에 피를 묻히게 되는 일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마법사 간달프는 골룸이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는 프로도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마땅하다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살아 있는 이들 중 많은 자가 죽어 마땅하지. 그러나 죽은 이들 중에도 마땅히 살아나야 할 이들이 있어. 그렇다고 자네가 그들을 되살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죽음의 심판을 그렇게 쉽게 내려서는 안 된다네. 아무리 현명한 자라도 모든 것의 끝을 볼 수는 없거든.”

정영진(인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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