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에 올라> 침묵의 대학 (한성대신문, 547호)

    • 입력 2019-09-02 00:00

어느 강의실, 교수가 학생들에게 무언가 질문을 던진다. 그의 말은 수십 명으로 가득 찬 강의실을 멍하니 울리고, 곧 침묵 속에 메아리친다. 빤히 정면을 응시하는 수십의 시선. 교수는 두 눈으로 그 사이를 헤집어 보지만 곧 아무런 소리도 찾을 수 없고, 멋쩍은 듯 홀로 답을 얼버무리고서 다시 강의를 이어간다. 강의 말미, 질문사항이 있느냐는 교수의 물음에도 답은 침묵으로 흘러나오고, 그 누구도 이 긴긴 침묵을 깨지 않는다.

교수학습 현장에서의 이러한 모습은 이제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정녕 지금의 대학이란 학생이 말하지 않는 침묵의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큰 배움. 강의실에서 ‘대학(大學)’이라는 명칭이 갖는 그 의미가 급기야 찾아보기 희박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배움이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답을 도출해내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을 이미 모두 알고 있음에도 모두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가르침’이란 양방향을 전제함에도 대학 사회에는 짙은 일방향의 가르침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학습자 전체에 만연히 퍼져있는 질문에 대한 기피다. 그 자체로 ‘물음’임에도 불구하고 질문이라는 것이 학습자 사이에서 빚어지는 질의에서, 특히 상대방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점차 ‘추궁’ 혹은 ‘비난’으로 인식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인식의 변화 속에서 대학의 침묵 문화는 점차 가속을 달려왔고, 현재의 침묵에까지 이르렀다. 개인의 더 나은 성장을 위해 부딪치고 상처 입어보아야 할 이때에, 단단한 자아를 형성해가야 할 지금에 우리 스스로의 자아는 무기력 속에서 팅팅 불어가고만 있는 것이다.

대학의 침묵. 트랙제 도입으로 학습자의 개인화가 급격하게 짙어진 지금의 한성을 생각해봄에 있어 ‘침묵의 대학’으로 당도할 미래는 특히나 두렵게만 다가온다. 진정 이 침묵을 깰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목소리, 그 단순한 송곳뿐이다. 배움은 당신으로 말미암을 때 그때야 비로소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자체로 완전하다 일컫고, 타인의 간섭은 ‘불편’이 되어버린 현재, 사소한 충격에라도 닿기만 하면 산산이 찢어질지 모를 유약함으로, 서로의 기분을 배려한다는 그 막연한 착함 속에서 정작 대학은 퇴화하고 있다. 이 배움의 터에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있는 것일까. 여전히 답은 없다.

최준수(한국어문 4)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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