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정> 세대론과 ‘최강’ 소비권력 (한성대신문, 550호)

    • 입력 2019-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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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19-11-11 00:08

최근 대학가에 부는 변화의 바람이 심상치 않다. ‘총장직선제’ 때문이다. 기존 수많은 대학이 간선제 방식으로 총장을 선출해 왔지만, 최근 대학가의 동향을 보고 있자면 총장직선제가 하나의 시류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총장직선제는 단어 그대로 학내 구성원이 총장을 직접 선출하는 방식을 말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많은 대학들이 직선제 방식으로 총장을 선출했다. 하지만 2012년 교육부가 직선제 폐지를 추진한 뒤부터는 국·사립대학을 불문한 거의 모든 대학이 간선제를 채택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직선제 쟁취를 위한 바람이 다시금 불고 있다. 현재 국립대학을 중심으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으며, 사립대학 역시 이화여대를 필두로 성신여대, 상지대, 서울대 등이 총장직선제를 쟁취했다.

여기에서 학생사회의 적극적인 노력이 눈에 띈다. 지난 5월에는 국민대 총학생회장이 학생 참여 총장직선제를 위한 ‘무기한 단식 투쟁’을 벌였다. 국민대는 결국 이들의 요구를 수용해 7월부터 총장선임규정 개정 논의를 진행했다. 숙명여대에서는 총학생회가 7년 만에 전체 학생총회를 열고 학생 3,000여 명의 의견을 모아 대학본부에 전달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총학생회장은 결국 ‘무기한 노숙 농성’을 벌이는 일까지 단행했다. 이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면, 총장직선제는 그저 일부 학생들의 작은 요구가 아닌 학내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사회와 재단의 힘이 막강한 사립대학에서 학생이 총장직선제를 위한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학내 정치에 관심 없는 학생들의 여론을 수렴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것은 물론, 대학 및 일부 교수들과의 마찰 또한 불가피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또한 사립대학이 법인화돼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이사회만이 총장을 선출할 수 있다’는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의견도 많다.

학생사회는 이러한 위험과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총장직선제를 쟁취하려 한다. 숙명여대 총학생회장의 말을 빌리자면 “총장직선제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즉, 학생에게도 총장을 직접 선출할 수 있는 투표권이 주어져야 학내 민주화가 비로소 번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한편으론 일부 교원들의 투표와 이사회의 최종 선택으로 선출된 총장이 학생들의 의견을 과연 얼마나 반영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같은 이유로 학생들은 계속해서 대학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이 투쟁에서 학생들은 앞선 단식 투쟁, 노숙 농성 등의 ‘초강수’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시류의 한 가운데서 한성대학교의 학생사회는 놀라우리만큼 조용하다. 또한 본교는 오는 12월, 간선제 방식으로 진행될 제10대 총장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

누군가 ‘민주주의의 꽃은 투표’라고 말했다. 과연 4년 뒤의 제11대 총장 선거, 또 그 이후의 총장 선거에서 한성대학교의 민주주의는 꽃 필 수 있을까. 그리하여 언젠가 한성대학교의 학내 민주화는 모두 만개할 수 있을까.

필자는 소위 X세대다. 자유분방함과 파격적인 패션, 적극적인 문화향유가 특징이라고들 했다. 대학생 시절, TV에서 X세대 얘기가 나올 때면 아버지는 “요즘 젊은 것들은 도대체...”라며 혀를 끌끌 차곤 하셨다.

“비싼 것만 밝히고, 버르장머리도 없고, 권위에 대들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사람들이 있어도 잡담을 해대고, 식사 자리에서 다리를 떡 꼬고 앉아있지.” 이 말은 아버지가 아니라 2400년 전쯤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고대 희랍 ‘꼰대’들의 불만을 나중에 누군가가 선생의 이름을 빌려 썼다고 한다. 후세대의 반항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이런 뉘앙스의 글을 썼다. “나이든 사람들은 오래 살며 많이 속아봐서 의심과 불신이 가득하다. 매사에 부정적이며 냉소적이다. 따뜻한 피를 가진 젊은이들과 달리 그들은 차갑다. 겁이 많아서다.”

악담의 포격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까지는 귀엽다. 세대론은 기본적으로 단절론이다. 무언가 자신의 세대와 다른 것을 찾아보고자 하는 접근이다. 단절을 자꾸 강조하는 것은 동질감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같이 놀고 싶은데 안 놀아주니까 샘이 난 거다. 존중받고 싶은 욕망과 권위의식, 자신의 젊은 시절과 윗세대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피해의식도 덧붙여진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윗세대는 그저 젊은이들에게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젊은 세대는 앉혀놓고 해대는 잔소리에 질려버려서 “노, 땡큐”하고 도망치고 싶은 거다. 자연의 섭리 같은 것이다.

최근 1990년대 중반 이후 출생한, 현재 대학생 나이인 Z세대에 대해 많은 담론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세대론은 기성세대가 만든다. 그들에게 Z세대는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바바라 크루거의 아포리즘처럼, 스마트 쇼핑을 통해자신의 존재를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소비세대다. 먹거리 배달앱 사용은 물론, ‘먹지도 못하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관대한 소비자 집단이다. 디지털 네이티브 Z세대는 현재의 고객이자 미래의 결제자들이다. 그래서 ‘최강 소비권력’과 같은 수식어를 붙였다.

이런 세대론은 젊은이들을 소비자로 호명할 뿐 동질감에 대한 염원이 없다. 젊은이를 ‘무엇’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바로 그 ‘무엇’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담고 있다. 외부의 명명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의하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 ‘꼰대’들이 동질감의 염원을 품고 진정으로 바라는 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김기홍(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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