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사람을 일컫는 ‘오타쿠’. 이 단어에서 비롯된 ‘덕후’는 과거 ‘집 안에만 틀어박혀 취미 생활을 하는,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을 의미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단어는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의미가 변하고 있다. 이 가운데 덕후의 기질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한 인물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름부터 남다른 잡지, 바로 <The Kooh>를 출판하는 고성배(35) 편집장이다.
<The Kooh>는 ‘덕후스러운 습성’, 즉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는 것을 주제로 하는 독립출판물이다. 고 편집장은 이곳의 1인 독립출판자로서 취재와 글 작성, 촬영 및 디자인 편집 그리고 마케팅까지 혼자서 전담하고 있다. 이런 그가 처음부터 독립출판물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시절, 건축학을 전공해 졸업 이후 건축사무소에 입사 한 그는 출판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회사 생활에 지쳤던 그는 ‘취미 만들기’라는 소소한 일탈을 꾸미게 됐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회사 생활이 고달파 취미 생활을 병행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발견한 게 ‘독립출판’이었어요. 생소하면서도 저에게 잘 맞을 것 같아 한 기업에서 진행하는 독립잡지 제작 강의를 수강하게 됐죠.”
그는 강의를 수강하며 독립출판에 대한 욕심을 키웠고, 결국 회사 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편집자의 길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독립출판물 1호다.
“<The Kooh>는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누구나 덕후’라는 모토로 시작됐어요. 아직도 사람들은 덕후라는 단어를 비웃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제 잡지를 소개하면서 ‘이것을 10권 모으면 너도 (오덕후를 넘어선) 십덕후가 되는 거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죠. 즉, <The Kooh>를 출간하여 덕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싶었어요. 덕후를 비웃는 사람들에게도 덕후의 기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는 본인의 작업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자신의 흥미를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한 번쯤 무언가에 몰입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라 믿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덕후의 기질이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기 꺼려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숨기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고 편집장의 출간은 <The Kooh>에 그치지 않았다. 잡지 외에 다른 성격의 책들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덕후문고』와 『닷텍스트』다. 덕후문고는 잡지에서 파생돼, 주변 만화를 아카이빙하여 그가 재탄생시킨 서적이다. 또한 닷텍스트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잊을 수 있는 기억을 간직하고자 개개인을 주력으로 하여 만든 이야기 책이다.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픈 마음이 컸던 그였지만, 출판해야 할 범위가 넓어져 업무가 가중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출판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지는 않았을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제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출판물의 범위가 넓어진 만큼 어려운 점도 부분 존재했어요. 굳이 한 가지를 꼽자면 제작비 마련이었지만 해결책은 간단했어요. ‘이가 아니면 잇몸으로’라는 심정으로 없으면 없는대로 출판을 진행했죠.”
여기에서 주변 환경에 구속받지 않고 인생을 있는 그대로 즐기며 살아가는 그의 인생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현재 그는 출판 작업 이외에도 독자와의 꾸준한 소통을 병행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예술관 런치박스>, 인사동 KCDF 갤러리 <자서전>, 북서울시립미술관 <언리미티드 에디션> 등 다양한 전시회에 자신의 출간물을 출품하는 것이다. 이는 독자들과 보다 많이 접촉하는 기회가 됐으며 그의 출판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참여했던 다양한 전시회 중 독립출판물 작가들만 참여할 수 있었던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2014년부터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계속 참여했어요. 그때마다 독자들이 전시회에 직접 방문해 제 책을 읽고, 피드백 해주시고, 좋아해주셨어요. 이 시간이 저에게는 많은 자극이 됐죠. 향후 독자들과 더욱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노력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한편, 그는 내년 출판 예정인 『덕후문고』 ‘게임북’ 작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 권, 한 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만들기’라는 목표를 갖고 작업 중이라는 그는, 앞으로도 이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는 바람을 함께 전했다.
“나이가 들어도 지금처럼 꾸준히 책을 만들고 싶어요. 나아가 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그리고 좋아하진 않더라도 구매하는 사람이 있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직 자신의 ‘덕후 습성’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꼭 하고픈 말이 있어요.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에요.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말고 살면서 한 번쯤은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에 몰입해 보길 바라요.”
안현경 기자